백목련 피는 뜻은

 

                                                                                         고임순

소녀시절, 넓은 마당에서 줄넘기 놀이를 즐겼다. 오빠와 내가 줄 양쪽을 잡고 돌리면 동생들이 하나 둘 들어와 뛰었다. 마냥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어른이 되니 남편이 그 줄을 잡아 주었다. 우리는 신나게 돌렸다. 차례로 태어난 3남매가 들어와 뛰더니 뒤따라 손자와 손녀들이 합세하여 웃음꽃을 피웠다.

행여 줄을 놓칠세라 줄기차게 돌리고 돌리던 50년 세월, 시름시름 기운이 빠진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줄 끝을 놓고 하늘 멀리 사라져 버렸다. “여보, 어디 가는 거예요, 나 혼자 남겨 놓고….” 2007년 8월 17일 새벽이었다.

울부짖는 나를 위로하던 아들딸들이 내 손에 책을 쥐어 주었다. 존다 번의 <비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빌리 그레함의 <소망, 상한 마음을 위하여>, 데이빗 A의 <상한 감정의 치유>, 헤르만 헷세의 <나의 아픔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등을.

칠흑의 동굴에서 한줄기 빛을 갈망하며 땀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 두문불출 책과 씨름했던 여름.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침체의 강을 넘으면서 삶의 의욕을 잃고 어두운 수렁과 같은 우울증을 경험했다. 오랜 간병생활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은 공황恐惶 장애로 인한 불면증과 어지럼증, 소화불량 등에 시달리며 물 한 모금 목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먹지 못하는 괴로움보다 더 뼈아픈 것은 허한 가슴패기를 난도질하는 참회의 칼날이었다. 그리고 뇌리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온갖 상념들의 어지러운 아우성들이었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 때 생각하지 말자고 하면 할수록 더 질질 노예처럼 끌려갔다.

가을이다. 수분이 빠져 빛바랜 나무 잎새들이 나를 미치게 하여 집을 뛰쳐나갔다. 수혈을 해도 피가 모자라 점점 식어가던 남편의 손. 그 얼룩진 손등 같은 단풍 잎새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광릉수목원 뜰을 광야를 헤매듯 뒤뚱거렸다. 그리고 몽유병 환자처럼 하늘공원 억새밭에 숨어 몸부림쳤다.

이러한 나를 포근히 보듬어 안아 주던 춘천의 안개 낀 호수. 그리고 내 오열을 삼켜 주던 울산 대왕암 바다. 사랑은 파도가 되어 넘실거리고 그리움이 밀려오는 넓고 푸른 물에 용서를 빌며 가슴의 응어리를 토해냈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부짖는 절규. 마치도 인간 존재의 고독감에서 오는 고뇌에 찬 에드바르트 뭉크의 <비명>처럼 처절했다.

산산이 부서져 내린 내 마음의 목 쉰 절규, 스스로 내적 충동이 폭발하듯 솟구치는 내 목소리는 그대로 한 편의 시이기를. ㅡ시여! 시여!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는 새빨간 뜨거운 피가 통하는 시다.(루이 아라공)ㅡ

그러나 겨울에는 침묵하라. 온 누리도 소복 단장하고 진혼가를 부르는 계절. 강원도 용평의 산방은 겨울 내내 흰 눈으로 두터운 솜이불을 덮은 채 말이 없다. 그렇지. 저 순결무구한 흰 빛은 바로 화선지가 아닌가. 내 평생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 주던 흰 빛이여.

나는 먹을 갈기 시작했다. 화선지 앞에서 붓을 들고 몰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김상용의 <향심>, 이백의 <송운>, 송강의 <사미인곡>을 한 획 한 획 절규하듯 온몸으로 눌러 썼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경지, 육신이 바스라지더라도 쓰고 또 쓰고 급기야 코피가 터져서야 낙관을 마쳤다.

어느덧 봄인가.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았어도 산다는 것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인 것을. 매일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하는 새벽 기도 시간에 내 영혼이 은총을 입었음인가. 섬광처럼 번득이는 영감과 함께 영혼의 울림을 감지한 순간 나는 전율했다.

이 세상에 살아남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혼이 충족된다는 것은 새 힘을 얻어 새로운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찬 새 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드시고 침체의 수렁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내일의 새 삶을 위해 고통의 위기를 기회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앞에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예온출판사’는 남편과 더불어 내 오랜 꿈이었다.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라도 목숨 걸고 도전해 보고 싶었던 일이 아닌가. 이 생명 다하도록 유지를 받들어 남편 몫까지 사는 것이 진정 승리의 삶임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목련꽃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곱다. 봄은 목련이 피지 않으면 봄이 아니다. 함께 가자고 꼭 잡았던 손을 이제야 놓아준 남편이 꽃으로 피어나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