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명자

벽의 정면에는 커다란 TV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화면에서는 사내 하나가 얼굴에 비닐을 뒤집어쓴 채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다. 사내는 금방 질식할 것처럼 숨을 헐떡인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악령의 소리처럼 낮고 음산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그는 그 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자세히 보니 사내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몸은 말뚝에 매여 있다. 그는 말뚝과 몸을 연결하는 끈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수가 있다. 작품에는 <go, stay, back>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설치미술전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화면 속의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자 갑자기 기계음이 “백back”,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뒤로 당겨진다. 이어서 “고go”,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주술에 걸린 듯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스테이stay”, 호령이 떨어지자 사내는 멈춰 선다. 기계음은 그렇게 끊임없이 화면 속의 사내를 조종하고 사내는 그 소리에 따라 가고go, 머물고stay, 되돌아가기back를 반복한다.

나는 그 작품 앞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앞으로 가려면 뒤로 잡아당기고, 되돌아가려면 앞으로 떠밀면서, 배후(背後)에 숨어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끊임없이 저 사내를 조종하는 자, 누구인가.

그것이 의식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것이든, 상대방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조종하는 자와 이에 조종당하는 자 사이의 심리적 현상을 로빈 스턴은 ‘가스등 이펙트’로 설명한다. 영화 <가스등>에서 착안했다 한다. <가스등>에서 남편 그레고리는 아내 폴라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실은 폴라와의 결혼도 계획적인 것이었다. 그레고리는 권위적으로 자신을 이상화하는 한편 폴라를 스스로가 병약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세뇌한다. 그레고리는 집안의 물건을 몰래 옮겨놓거나 숨겨놓고는 마치 폴라가 그 일을 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꾸민다. 그레고리의 교묘한 술수에 속은 폴라는 점점 혼란에 빠지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진다.

이처럼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관계를 로빈 스턴은 주로 인간관계에 국한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것이 어디 인간관계뿐이랴. 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명예가,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조차도,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들은 모두 우리의 삶을 묶는 끈이 된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대상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서 최선의 것인 것처럼 이상화되어 있으며,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더 매이기 마련이다.

영화 <가스등>의 말미에서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그레고리가 의자에 묶인 채 아내 폴라에게 줄을 끊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폴라는 “돕고 싶지만 미친 여자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냉소하며 이를 거부한다. 그레고리는 잡혀가는 순간에야 말한다.

“그 보석들을 보는 순간 무엇에 홀린 것처럼 머리에 불이 일었어. 평생 그 보석들을 원했지.”

결국 그레고리를 묶고 있던 끈의 조종자는 보석이라는 이름의 물신(物神)이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끈으로 시작해서 끈으로 끝난다. 어머니의 몸 속, 태초의 시원始原과 같은 신비의 공간에서 우리는 탯줄을 통해 생명을 키운다. 그리고 탯줄을 끊고 세상에 태어나서는 온갖 인연의 끈에 매어 세상을 살아간다. 부모자식지간이나 부부간은 물론, 학연이나 지연, 그 외에 우리 삶의 시공간 안에서 만나는 만물과의 인연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이다. 그렇게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날 우리는 다시 손발이 끈에 묶인 채 어두운 땅 속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여정은 또한 ‘가고, 머물고, 되돌아가는’, ‘go, stay, back’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한 생명의 탄생은 이 세상에 온다는 의미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출발점에서 보면 먼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렇게 생의 긴 여로에서 머물다가, 본향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여정인 것이다.

그 여정의 출발점인 유년의 시간은 너무도 빨라 꿈결같이 흘러간다. 마치 한 마리 나비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아이처럼 우리는 이상을 찾아 먼 길을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이미 온 길을 다시 갈 수 없는 긴 여행의 시작에 불과하다. 한 시간, 하루, 그리고 한 달… 그렇게 겹겹이 주름져 이루어지는 생의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삶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고 산을 넘으면서, 산다는 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낙하연습이라는 걸 차츰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욕망’이라는 길손과 만나게 된다. 그 욕망은 내내 우리 삶을 조종하는 끈이 된다. 때로는 치료약이 되고 때로는 독이 되는 파르마콘처럼, 욕망은 가끔 삶의 추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아무리 채우려 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갈등과 좌절과 고독안에 우리를 가둔다.

그러한 고독의 길 위에 머무는 생의 시간은 길다. 마치 새벽 달빛을 보면서 길을 떠나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낮의 길고 긴 치열함 뒤에는 반드시 저녁이 온다. 아침에 눈을 뜬 해가 저녁에 제 집을 찾아 돌아가듯 인간에게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안식을 갈구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리며 지나온 시간 앞에서 어떤 이는 뒤를 돌아보며 회한에 잠길 것이고, 어떤 이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새롭게 맞을 죽음의 시간을 겸허하게 준비할 것이다. 어떤 이는 죽음의 시간 앞에서, 삶은 이상향을 그리워하며 허상을 찾는 숨바꼭질이었다고 말하거나, 삶은 오지 않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처럼 기다림의 시간들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은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접는 일을 ‘하늘의 것은 하늘로 돌아가고, 땅의 것은 땅에 남는 현란한 회귀回歸’라고 말했던가.

이처럼 ‘가고, 머물고, 되돌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설치 미술전의 사내는 나에게 사유의 긴 끈 하나를 늘어뜨려 놓고 있다. 그는 과연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는 비닐을 벗어내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을 묶고 있는 끈을 스스로의 손으로 풀 수 있는 날, 비로소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시지프스의 후예들이 아닌가. 오늘도 거듭되는 시간 앞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옷깃 여미고 행장行裝을 꾸리는데, 욕망이란 이름의 불청객은 여전히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나에게로 와봐……’

어쩌면 우리의 생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자유는 멀리, 저 멀리에서 끝내 어렴풋한 실루엣만 보이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계간수필≫로 등단(2002년)

충남대학교 국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