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젖

 

                                                                                           이고운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얼룩무늬 사다리가 눕는다. 생존의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 그 뒷모습을 비끼며 키 작은 노파가 정물처럼 건너온다. 깜박거리는 푸른 퉁방울이 노파를 재촉한다. 무딘 걸음이 바쁜 발을 밟으며 다가온다.

눈이 먼저 가는 푸근한 곳. 노파의 가슴에 살구색 실크셔츠가 납작 붙었다. 절벽이다. 얹힐 데 없는 내 시선이 벼랑을 더듬다 허전함을 거두려는데, 저 아래 배꼽 어름에 연적보다 작은 볼륨이 도도록이 찍힌다. 아니, 어쩌다 저기까지? 가슴의 경계를 넘고도 용서가 되는 수수께끼, 이국에서도 색이 오롯한 저 몽고반점은 갈등이 끝나는 꼭짓점이 아닌가.

처음 그때는 쌀알 같은 점지였다. 오리온을 양각한 낙관이 찍힌 줄도 몰랐다. 암사지도, 둥근 플러그에는 누구도 세지 못하는 핀 구멍이 음각돼 있었다. 점지가 된 그 핀 홀로 비밀한 바람이 쉼 없이 불었다. 거기에 빛이 쌓이면서 날마다 설레는 부레옥잠이 수신되었다. 찌~ 찟찌~음파를 타고 암호가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게 오는 연애처럼.

히말라야에 눈 쌓이듯, 중생대를 거치면서 바다로부터 융기하는 산, 그 솟아오름은 지맥을 흔들며 동산에 떠오르는 상현달로 배슬리었다. 마치 어느 먼 미아의 행성이 드디어 우주를 닮아버린 둥글음으로 날아와 나란히 착지하듯이. 그 아릿한 몽오리에 수줍음은 눈이 시금거렸다.

물끄러미 찍혀있던 관지가 미동하면서 연달래가 스몄다. 봉긋봉긋 하는 신비를 감싸 안으면서 숭고함이 무엇이며 그 사명이 무엇인지, 물에 종이 젖듯이 윤사월 아침나절을 뻐꾹 소리에 젖었었다. 숭고함은 헤쳐보임이 아니므로 안으로 안으로 감추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레이스그늘에 묻었다. 그래도, 푸른 잎사귀를 젖히며 햇빛에 비춰보는 꿀참외처럼 꽃덤불 사이로 소목소목 부풀었다. 탐욕의 시선이 야동 하는 세상 한 귀퉁이를 도톰거리는 탄력으로 밀어내며 더한 눈부심을 모았었다. 부끄럽다는 것 또한 수치를 최음 하는 욕망일러니, 구박도 더러 궁시렁 거리면서.

최고와 최상의 영지, A꼭지에서 a꼭지까지의 거리는 어떠한 생도 안을 수 있는, 그곳은 수천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성전이었다. 아무리 곱해도 정답이 안 나오는 무한의 원주를 그리는 독백의 공간이었다. 그 안으로 가장 짧은 제 그림자가 포개지면, 탱탱한 정오에 소수점 뒤로 끝없는 물음과 선답이 깨알같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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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중하는 시각, 신이 여자를 가장 정확한 제 자리에 놓을 때가 있었다. 꿈꾸고 염원하면서 풍만한 한때의 오수에 검님이 성불을 하고, 산수유 빨간 열매를 젖니가 지그시 깨물면 쾌감은 접지의 전류를 탔다. 빨지 않으면 트이지 않는 구멍, 그것은 생명을 숙성시키는 샘의 낙원이었다. 마알간 입술이 닿지 않으면 녹을 수 없는 살얼음 같은 희와 열, 너와 나,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가는 살의 통로였다.

그 온기의 언저리에 겉돌던 시린 날들, 까마득한 정점을 내려다보며 돔을 허물려는 벌떼들을 한사코 밀어냈다. 둥글음을 지킨다는 것은 짝짝이가 되지 않으려는, 혼자 어디론가로 헤매지 않으려는 염원이었다. 쉴 새 없이 지진 하는 세상에서 성을 지키려고 보다 성능이 우수한 방패들을 가져다 막았다.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올려주고 받쳐주고 모아주고 황금방패에 꽃을 수놓아 가면서 스스로의 싫증을 견디었다. 어느 날은 젖어서, 어느 날은 불같아서 탐욕과 목마름을 누르며 가슴 떨리는 손으로 몰래 치마끈을 조였었다.

진보와 보수, 해방이 깃발로, 육이오가 탱크로, 혁명과 유신이 군화발로 지나고, 생명을 분신焚身하는 아망을 떨어내며 짚불처럼 고달픈 볕뉘를 앓았다. 사랑과 증오, 안주와 진취를 포옹하며 하나는 가자하고 하나는 머물자 하고. 비를 피하며 폭풍에 엎드리며 흐려진 초점을 눈 비볐다.

생의 출렁임을 팜파탈(Femme Fatale)로 착각해 비루한 누명이 씌워지던 위태한 벼랑머리를 묵묵히 걸어서, 기능과 멋이 이데올로기를 타고 삐딱길로 떠내려 오면서, 썰매는 가속도가 붙었으리라.

때로는, 돌출된 표적이 되어 정상을 입맛 다시는 부질없는 주물럭거림으로 짝짝이가 되면서 시나브로 옮겨갔으리라. 우수수 떨어지는 석양을 밟으며. 그 인(人)의 골짜기를 맴돌다 간 사람들, 안개를 먹은 물결같이 멍울진 먹머루빛 그늘이 묻혔다.

다 주기 위하여 보호하고 지켜야 함은 숭고하다. 쉼 없이 출렁거리며 물길에 씻기며 한 점 몸으로 줄여온 조약돌, 이제는 욕심낼 것도 싸울 일도 없어졌다. 흔들릴 무엇도 애 터질 것도 없다. 굳이 가릴 이유도 없다. 멀리까지 길동무 해준 청춘을 감사히 돌려보내고, 이젠 바쁠 것도 없다. 오랜 지병을 숨고르기 하며 배꼽의 영역을 베고 누웠다. 저것은 무한 해탈에로의 진화이다. 주먹보다 큰 갈등의 통점이 다시 마르면서 오디처럼 작아진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평정인가.

흔들림이 멈추어진 정점의 찌. 영원히 아물지 않을 까만 인적만 남아, 둥근 풍만도 뜨거운 지열도 다 주어버린 보헤미안이 바람의 섭리로 가고 있다. 해맑은 살구색 세월을 가물가물 가고 있다.

고목둥치에 붙은 매미허물 같은 버스가 가슴을 치며 다가온다. 내 명치 밑을 만져 보게 하는 이 아침 출근길, 짝젖을 들까부는 뽕브라를 추스린다.

 

 

≪계간수필≫(200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대표에세이회, 계수회 회원, 개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