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연습

 

                                                                                           최영임

간밤에 꿈을 꾸었다.

큰아들과 손녀를 만났는데 꿈속에선 언제나 그랬듯이 말 한 마디 못하고 애만 쓰다 눈을 떴다. 손발을 움직일 기력이 없기도 했지만 생생한 아이들 모습이 지워질까 미동도 않은 채 다시 눈을 감는다.

어떤 때는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꿈을 꾸면 무슨 연유일까 골똘해진다. 큰 구렁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이나, 알밤이라도 줍는 꿈이면 얼른 수화기를 든다. 아이들에게 별일 없느냐고 넌지시 물었는데 아무 일 없다는 답변을 들으면 혼자 웃고 만다. 그리 신통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나 꿈은 호기심을 끈다.

때때로 정말 궁금해지면 어둠도 걷히지 않은 새벽에 자는 사람을 깨워 꿈 타령을 하게도 된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은 의도 때문이다. 언제나 짧고 명쾌한 한마디에 꿈은 일시에 꿈으로 사라진다. 꿈과 현실을 애써 연결하려다 “개꿈이네” 한마디에 훌훌 털어 버리고 만다.

꿈속에서는 사소한 일도 힘이 들고 말의 연결도 어렵다. 일방적인 말만 들으니 깨어서도 자꾸 되짚어 보려고 애쓴다. 안개 속처럼 희미한 형체로 만나도 그리움이 해갈되니 꿈은 꾸고 볼 일이다.

지난해 7월 해외 출장이 잦던 큰아들이 아예 근무지를 베트남으로 옮기게 되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울며 아빠를 부르던 손녀를 안고 달래던 것이 엊그제 일 같다. 시간이 흐르며 일 때문에 따라가지 못한 며느리도, 아이도, 한풀 꺾여 바라보기에 측은했다. 어서 따라가라고 종용했으면서도 막상 올 유월에 떠나고 나니 가슴엔 휭 하니 큰 구멍 하나가 뚫렸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여도 같은 지역, 같은 하늘 아래라는 생각으로 위로하며 살았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후 몹시 힘들었다.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하게 했다.

아이의 모습이 한시도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 까르르 넘어가던 웃음소리, 새소리마냥 높은 노래 소리. 청아하게 책 읽던 아이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 두리번거리다 꿈꾸듯 멍해지고 만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유난히 손자손녀에겐 자중자애 하셨던 분이시다. 가난한 살림살이와 많은 가솔의 뒷바라지에 어머니는 언제나 종종걸음이셨다. 편안히 젖먹일 시간도 부족했던 그 엄마의 자리를 할머니께서 채워주셨다. 초등학교 소풍과 운동회 때면 함지박에 먹을거리를 담아 머리에 이고 따라 오셨던 분도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또 이야기꾼이셨다. 저녁이면 마당 한구석에 놓은 모깃불의 알싸한 연기가 마당을 휘돌아 별을 향해 오르고, 저녁상을 물린 멍석에서 할머니 무릎을 얼기설기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다보면 꿈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는데 끝은 늘 가물가물하다. 달이 되고 해님이 되었던 남매 이야기며, 우리가 살던 앞 개천으로 오르내렸다는 도깨비 이야기는 언제나 무섭고도 재미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감기는 눈을 부릅떠보지만 늘 도란도란 들려오는 자장가가 되고 만다. 밤하늘을 하얗게 덮은 별은 어느새 솜털 같은 이불이 되어 모두를 꿈길로 이끈다. 맏이로 오빠가 있긴 하나 손녀딸 다섯에 기막혀 하실 법도 하건만 내색 한번 없이 사랑을 주셨다.

나도 손녀에게 그런 할머니이고 싶었다. 지난 늦여름 손녀가 제 엄마 곁을 떠나 우리와 함께 여행을 했다. 어릴 적 기억이 평생을 간다고 하여 그런 시간을 자주 갖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이별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유년기에 이 할머니와의 여행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자주 볼 수 없다는 것과 하루하루가 다른 아이의 성장을 지켜 볼 수 없다는 것이 힘들다.

아이들을 그리는 마음이 유별스럽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칠월중순에 덜컥 병이 났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나보다. 힘든 생각에서 벗어나려 애쓰면 애쓸수록 허사였다. 우울한 마음은 허우대 좋은 몸을 비웃듯이 쓰러뜨렸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고통에 내 몸을 맡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난 이별연습이 부족했다. 해외를 이웃집처럼 오가는 세상인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언제까지나 옆에 두고 볼 줄 알았다. 이별이라는 주사에 내 비명 소리가 너무 컸다.

내가 부모 곁을 떠났듯이 자식도 그렇게 떠나는 것을….

어머니는 그런 이산의 아픔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이산가족상봉으로 56년 만에 동생을 겨우 한번 만나고 또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몸져누운 어머니에게, 한 번의 만남도 이룰 수 없었던 이산가족은 또 얼마나 많으냐고 위로를 드렸지만 그 절절한 그리움을 어찌 헤아릴 수나 있을 것인가? 거기에 비하면 이제 겨우 1년 남짓 내 엄살이 유별난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사무치게 아이가 보고 싶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어느새 낌새를 느낀 작은 손녀가 “할머니. 큰아버지한테 전화 걸까” 그러면서 내 품에 안긴다. 그 눈빛이 사뭇 진지해 결국은 미소를 끌어내고 저도 따라 웃는다. 두 돌 지난 손녀의 눈빛에 위로를 받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 이별은 가슴으로 만나는 긴 꿈에 불과한 거야.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도봉수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