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처럼

 

                                                                                            허세욱

모처럼 여가가 생겼다. 툇마루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죽물 상자 속에는 내 잡동사니가 수용되어 있다. 그 체적이 해마다 불어나건만 버릴 수도 고를 수도 없어 이날 저날 미루어 오던 터였다.

그 속에는 해마다 세밑이면 날아오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 거기다 국내외서 이따금 육필로 찾아오는 편지들이 쌓여 있다. 그것들을 한 장이라도 버릴 수 없어서 였다. 임시로 그것들을 꾸리어 묶고 꾸러미마다 연도를 표시하는 쪽지를 달았다.

그 상자를 열고 뭉치들을 풀어 놓았다. 한 해의 분량이 자그만치 한 광주리였다. 나는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다시 펼쳤다. 까맣게 잊었던 사람이 내 귓전으로 다가 와서 멍울진 소릴 한다. 나는 실어증에 걸린 양 멍충했다. 그리고 아물거리는 눈까풀이 축축했다. 묵은 카드, 묵은 편지를 펼치면서 노다지를 캐듯 그것들을 취사했다.

거기에는 두가지 원칙을 잣대로 삼았다. 육필이 아닌 인쇄품은 일차적으로 제외시켰다. 육필인 경우라도 그이의 속 마음이 얼마나 잉크에 묻어 있는가의 체온 측정으로 표준을 삼았다. 결국 껍데기는 버리고 속 마음 그 알몸만을 지니겠다는 속셈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파일에 끼워 넣었다. 어릴때 크로바 한 잎 뜯어서 교과서에 끼워두고, 은행잎 한 장 주워서 사전에 끼워 넣듯 그렇게 작업을 했다. 한나절 꼬박 사루고 한 박스의 편지와 카드를 한 권의 파일로 줄인 뒤 허리를 폈다. 자못 뿌듯했다. 그 체적이 엄청 줄어서요,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꾸러미 비닐봉지에 줄줄이 누워 있어서 였다.

나의 체적 줄이기는 총면전이었다. 수십 년 동안 꿀벌이 꽃가루를 물어 나르듯 그렇게 모았던 만 몇 천권의 책을 어느 날 선뜻 묶은 채로 모교와 고향의 도서관에 기증해 버린 것이나 벌써 칠, 팔년 전부터 냄새나는 구닥다리를 버린 채 「임대 마차」를 타고 여기 저기로 전세살이 다니는 것도 물론 그 전략의 한가지였다

타고난 역마살로 세상을 휘젓고 다닌 것은 그렇다치고 가는 곳마다 증명을 남긴답시고 눌러댄 샷터, 그 결과물로 사진도 만만치 낳았다. 그것들이 증명이요 추억인 만큼 나에겐 중요하지만 남에겐 한갓, 인쇄품일 수 있다. 그것도 당연한 체적 줄이기의 대상이지만 너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테마별로 분류해 보았다. 학술 활동, 문단 교유, 문학 기행, 사적 탐방, 자연 탐승 등으로 대별해 보았다. 그중 몇 가지는 가닥을 잡아 어느 문학관에 기증하거나 어느 출판사에 넘기기도 했다.

그래도 나의 문갑에는 아직 올망졸망한 봉투나 비닐 봉지가 비죽거렸다. 날마다 다이어트 한답시고 소식하면서 뻔질나게 공을 치건만 비죽거리는 나의 뱃살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잘 다니는 공원. 석양이면 서둘러 방송을 했다.

‘여러분! 퇴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퇴장 준비와 함께 앉았던 장소를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퇴장 시간을 지키고 당신이 앉았던 자리에 쓰레기나 오물을 남기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요컨대 뒷자리를 치워 달라는 말인데 깨끗한 뒷자리를 위해선 아예 그것들을 남기지 말 일이요, 남기되 그 부피를 줄이면 훨씬 쉬랴만 누가 그걸 모르랴!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가버린 목숨도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렇게 예쁘고 깔끔한 짓을 하는 것들은 대체로 부피가 작았다. 나비나 참새 같은 곤충 조류가 있는가 하면 민들레나 목련 같은 꽃에 떡갈나무나 상수리 같은 갈잎이 그렇다. 똑 같은 미세 생물 가운데도 동물보다는 식물이 보송보송했고, 똑같은 식물 가운데도 아름다운 꽃잎보다는 충충한 나뭇잎이 칼칼했다.

한 마리 나비요 한 마리 참새라면 얼마나 좋을까? 꽃그늘 채곡 채곡한 울타리 너머 푸드렁 참새가 날면 훨훨 자리를 옮기다가 붉은 노을로 덧없이 사라진 그 날개가 가볍다. 소나무 꼬불한 가지 끝에서 하얀 햇볕을 쬐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저쪽 골짜구니로 쏜살같이 잠겨 버리는 그 뒷모습이 시원스럽다.

역시 햇볕이 부서지는 어느 오후, 바람 한점 없어도 조용히 일어서서 저 하늘 속으로 보일 듯 말 듯 사라지는 민들레 꽃씨야말로 자생자화를 모르는 자생자화다.

어느 산모퉁이서 숨은 듯 자라다가 그 작은 키, 그 파리한 가지를 훌쩍 떠난 상수리 잎새는 그 길로 굴러 굴러서 어느 나무 등걸에 잠시 머물 뿐 그 뒤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그것들의 떠남은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그 줄기 그 가지를 떠나면 그만인 걸, 그들이 떠난 자리에 아무도 빗자루를 들 까닭이 없다.

아름답게 떠나가는 사람을 더러 떨어지는 꽃잎에 견주는 글이 있다. 그럴법하다. 훨훨 나부끼다 사뿐히 착지하는 그 모습을 기려사다. 그러나 어찌 민들레의 살폿한 비상과 상수리 잎새의 졸연한 표령만하랴! 꽃이 늙으면 초췌한 모습을 보이다가 바람이 이는 달빛에 시나브로 떨어져서는 아스팔트에 뒹굴다가 끝내 길손에 밟혀 질퍽거리기 일쑤다. 그토록 고결했던 목련꽃 그래서 꽃 피는 밤이면 우러러 보았던 그이도 한 밤 꽃샘바람을 견디지 못한 채 그만 한 길 얼룩으로 남고 나는 혀를 찼었다.

모처럼 툇마루에 갈무리했던 해 묵은 카드와 편지 한 상자를 한 묶음의 파일로 줄인 날, 나는 적이 기뻤다. 처음으로 남기기보다 남기지 않기도 어려움을 알았고, 민들레 홀씨나 상수리 가랑잎의 비상과 표령, 그 까닭이 다만 그 부피가 가여울 정도로 작은 데만 있지 않고, 아무래도 그들이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남기려는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던 순진무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가랑잎 한 장, 달빛 푸른 밤에 아무도 몰래 살며시 날아갈 수 없을까? 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