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례

 

최병호

 

 

저는 서동입니다.

신라 때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야한 노래를 퍼뜨렸던-. 선화공주를 배필로 맞은 후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가 641년에 살짝 시간 속으로 몸을 숨겼었죠. 저는 1999년 연말에 주영으로 다시 태어난 그때 그 공주를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속마음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주영 공주님에겐 임자가 있으니 주변에 얼씬 마라. 내가 모셔와 한 소끔  행복하게 살 테다” 라는 청혼가-. 세월이 9년 흘렀고 이제 노래에 담긴 서원誓願이 이루어지려 하는 순간입니다. 저를 알고 공주를 아시는 여러분들께서 증인이 되어 축복해 주십시오.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한다.”는 시구가 있습니다. 앞 구절만 평생 기억하며 오래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 0 0 · 이 0 0

 

♥ 일시 : 2008년 6월 5일 (목요일) 오후 6시 30분

♥ 장소 : 르네상스 서울 호텔 3층 다이아몬드볼룸

 

이 희한한 청첩의 혼례를 내가 주재主宰했다. 처음엔 꺄우뚱했지만 어쩌면 나도 전생부터 그들 주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정말 희한한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저절로 웃음이 터질밖에.

정해진 일시에 로비에 들어서니, 축화祝花가 입구 양편으로 생 울처럼 헌칠하다. 좌우로 가지를 뻗쳤다면 희한한 꽃 터널이 됐을 듯. 축화마다 명성名聲에 걸 맞는 휘호들이 젊잖게 드리워져 있다.

매우 넓은 식장이다. 중간을 가로지르는 통로의 한가운데에, 주례단主禮壇으로 이어진 신랑신부의 비단길이 한단 높게 이어지고 그 밖의 공간은 하얀 너울을 쓴 크고 둥근 식탁들이 정연하게 놓여 있다. 좌석은 여러 백 석이 될 듯.

식장 종사원에게 ‘나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니 마이크 볼륨을 최대로 올려 달라’고 당부하고 주례테이블 앞으로 향한다.사회자가 개식을 선언하고 신랑신부를 불러들인 다음 ‘맞절’ 순서를 알린다. 나는 그들이 맞절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하객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한다.

 

오늘은 옛날 서동이 이 땅에 환생하여 몽매에도 그리던 옛 공주를 다시 만나 청혼의 노래를 외운지 9개성상, 마침내 그 이중창이 이루어지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 역사적인 혼례에 맞절을 달랑 한번만 한다는 것은 어딘가 미흡하고 의식의 존엄을 희석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에 본 주례는 이 맞절을 삼세번 주재主宰하기로 합니다.

첫 번째 맞절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으로 시간을 잊게 하는,’ 그런 해로偕老를 다짐하는 맞절입니다. “맞절!”

두 번째 맞절은 이제 한 가정의 주체로서 더불어 생긴 시가와 처가를 본가처럼 화목하게 아우르자는 다짐의 맞절입니다. “맞절!”

세 번째 맞절은 부모님들이 우리를 잘 길러주신 것처럼 우리도 건강한 아이들을 낳아 온 집안의 기쁨조가 되게 하고 작으나마 인류계승번영에 이바지하자는 다짐의 맞절입니다. “맞절!” (음향시설과 방음장지가 훌륭해서, 종사원에게 ‘작은 목소리 운운’했던 일이 와락 부끄럽게 느껴진다.)

 

사회자가 ‘혼인서약’ 및 ‘성혼선언’의 차례를 알린다.

‘혼인서약’은 맞절의 다짐을 주어진 양식의 문절에 혼융해서 받는 것임을 밝히고, ‘성혼선언’은 주어진 문절의 말미에 ‘천지신명 앞에’란 말을 추가하여 의식의 색조를 살짝 강조한다.  

 

사회자가 ‘주례사’ 차례임을 알린다.

인사는, 주례로서의 축하에 이어 오늘이 있기까지 이들을 잘 길러주신 양가 부모님들께, 또 잘 가르쳐주신 각급학교 은사님들께, 그리고 직무의 손길을 잘 다듬어주신 직장의 상사님들 동료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고 만장하신 하객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간결하게 마무리한다. (신부가 공주님이었으므로 신랑에 앞서 호칭키로 한다.)

 

신부신랑은 이 땅의 대표적인 대학(ㅇ여대·ㅅ대학)에서 대표적인 노력을 기울인 재원이요 재사입니다. 지금은 대표적인 직장(ㅅ구릅·ㅈ신문)에서 신부 이 00양은 핵심적인 직무에 하루해가 짧기만 하고, 신랑 조 00군은 사회정의 구현의 목탁이 되어 분주한 나날을 엮고 있습니다. 이같이 전도가 양양한 커플에게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지 망연해집니다.

더구나 이들은 성혼에 이르기까지 여느 선남선녀들처럼 이른 바 ‘선택의 고민’에 서성댄 적이 없는, 오직 사랑의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던 전설적이고 역사적인 희한한 천생연분의 한 쌍이 아닙니까. 이에 무슨 부연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이에 본 주례는 이들에게 소담한 연꽃 다발을 한 아름 안겨드리고자 합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나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때문에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고 그 의지를 고치지 않습니다. 속은 비어서 사심私心이 없고, 가지가 뻗지 않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그윽한 향기는 멀리 퍼져 더욱 청정합니다.’ 그뿐입니까. 뿌리는 우리의 머리를 쇄락하게 하고 차茶는 우리의 심장을 맑게 해줍니다.

어느 시인은 연꽃을 ‘할머님의 수정 품속 같은 꽃’이라 했습니다. ‘파란 연못 속에 파란 돌을 감추고 돌아서 있는 어머님의 목소리 같은 꽃’이라 했습니다. ‘누님의 반쪽 거울 속 같은 꽃’이라 했습니다. 과연 할머님, 어머님, 누님은 연꽃 같은 우리 가정의 그윽한 향훈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중심입니다.

‘가장 인간적이기 위해선 가장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란 가장 원초적인 ‘우리’의 공동체입니다. 나는 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며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가족이란 이 존재자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존재케 하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장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풀립니다.     

바라건대 오늘의 신부 신랑이시여, 가장 인간적이기 위해서 가정을 생각하고, 가장 가정적이기 위해서 할머님 어머님 누님을 배우고, 그 사랑과 의지를 연꽃 이미지와 아우르는 시간을 삶의 구비마다 반추해 보시라. 영특하게 닦여진 지혜가 더욱 농밀한 향훈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혼탁한 일들을 잊게 하는 다양한 사랑의 현현이 아니겠습니까.

옛 서동과 선화공주님이 이 땅에 환생하여 혼례를 올리는 이 신비로운 날, 이 성전이 그지없이 아름답습니다. 본 주례는 이 축하분위기가 다함없이 확산되길 재삼재사 바라마지않으면서 이상, 간단히 주례말씀을 가름코자 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마디 부연합니다. 본 주례와 신랑은 신랑 중학교 때 사제의 연입니다. 주례도 그만큼 오래 기다려준 셈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