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썸머

 

신현복

 

풍성하고 짙푸름이 우거진 숲과 이글거리는 태양, 솜사탕처럼 뽀오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수놓는 여름이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여름’ 선율이 거침없이 도도하게 파도를 타고, 녹음이 짙은 산에서는 폭포수가 감청색 깊은 물위로 부서져 내리는 격정과 젊음의 계절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모든 것이 서서히 옅은 색으로 퇴색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정수리에 따갑게 내리 꽂히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오래지 않아 삽상한 바람에 힘을 잃고 조금씩 인색해 지리라는 것을. 빈틈없이 꽉 들어찼던 짙푸른 녹음과 너무 열정적이어서 숨 막혔던 계절은 이제 서서히 여유로운 틈새를 보일 것이고, 서녘으로 이울며 짧은 볕에 반사되는 주홍빛 잎새가 눈이 부실 것이다.

그리고 사위는 서서히 모든 것을 비워내고 쓸쓸함과 고즈넉함 또는 아쉬움으로 또 다른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사철의 변화가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중년을 보내는 이즈음  유난히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절감하는 계절, 무성한 여름을 떠나보내고 맞는 가을이다.

오래전 본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삶의 욕망을 잃어버린 한 사형수의 이야기-쓸쓸한 가을날에 찾아 온 잠깐 동안의 따뜻한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한 외과의사의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음을 안타까워하는 관선 변호사의 법정공방의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살인혐의를 벗고 삶에의 희망을 갖게 하려는 변호사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남편에게서 받은 폭력과 애증으로 인한 구속으로 인해, 오로지 삶을 포기해야 만이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여겼기에 삶에의 아무런 애착이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혐의를 벗게 해주려는 한 관선변호사의 따뜻함에 한 가닥 햇살 같은 사랑을 만나게 되는데.

아무런 삶에의 애착도 희망도 없이 죽음만이 약속된 한 여인의 암울한 삶에서 그 변호사와의 만남은, 메마르고 쓸쓸한 가을날에 찾아오는 인디언 썸머처럼 그녀의 힘든 삶을 잠깐이나마 따뜻함과 사랑으로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 날씨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여름날과 같은 기후가 잠깐 오는 현상을 인디안  썸머라고 이 영화에서는 설명해 준다.

현악오중주를 작곡한 뒤 내면적인 영감의 쇠퇴를 느끼고 작곡을 그만 두려 했던 브람스, 유서까지 써 놓을 정도로 절망의 날을 보내야 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운명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대 제일의 클라리넷 주자인 리하르트 뮐펠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연주를 들은 브람스는 클라리넷의 매력에 흠뻑 매료되었고, 이후 새로운 정열을 쏟아 그 악기 특유의 애잔한 그리움과 우수를 잘 살리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 낸다.  클라리넷 오중주-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비통한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며, 물기를 가득 머금은 대지가 스스로 싹을 틔워내듯 숭고한 체념과 비장감이 느껴지는 브람스의 유언과도 같은 곡인 것이다.  브람스가 만년에 창작력을 회복했던 이 시기야말로 늦가을에 잠깐 찾아오는 포근한 날씨, 인디안 썸머가 아니었을까.

인디언 썸머, 일반적으로 북미에서 인디언들이 여름이 끝나고 겨울준비를 하는 가을에 좋은 날들이 잠깐 주어지는 기간을 말한다. 각 나라마다 기후와 풍습이 달라서 ‘늦여름’ ‘집시의 여름’ ‘아낙네의 여름’이라고 달리 이름 하지만, 춥고 삭막한 계절이 오기 전 잠깐 찾아오는 화창한 날을 의미함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화려하고 풍성한 여름을 보내고 이젠 모든 것이 시들어 말라가는 계절 속에서, 잠간이지만 다시 번 찾아오는 따뜻하고 찬란한 빛은 삶을 생기 있게 할 것이다.  

무성하고 싱싱했던 나뭇잎이 물기를 잃어가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서서히 퇴색해 가는, 가을의 시작이다.  힘없이 떨어지는 나뭇잎도 나무의 일부로서 열심히 나무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가로수의 그늘이 되어 행인들의 땀을 씻어 주었을 것이다.

그토록 거침없이 도도했던 여름이 있었기에, 그리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모든 것을 조금씩 비워내는 계절을 맞아야 함을 알고 있다.  생의 무성했던 여름을 보내고 앞으로 보내게 될 가을의 시작에서, 나의 날들이 너무 쓸쓸하지는 않을지, 겨울날은 또 얼마나 길고 메마를지……… 이즈음에 생각해 본다.

창경원 돌담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며,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 불면의 밤을 보내며,  언제 부턴가 ‘인디안 썸머’를 꿈꾸는 나를 문득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앞으로 주어지는 나의 생의 터널- 즐거울 수도 혹은 외로울 수도 있을- 에서 나의 ‘인디언 썸머’는 어떤 모양으로 나를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