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생

 

조선근

 

그날 비보를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 삶속에서 단 하루를 선택해서 빼 버릴 수 있다면 그날 그 시간을 꼭 집어내어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 싶다. 미국, 동부 디트로이트에 다녀온 지 꼭 일 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7월 22일. 11시. 한낮의 더위가 몰려 올 즈음 청천벽력같이 날아든 비보는 “철수가 죽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몰라 짜증스럽게 되묻다가 남동생의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만 수화기를 떨어뜨려 버렸다. 이렇게 간단하게 내 귀에 대고 그가 죽었다고 말하는 이 현실을 벌컥 떠밀어버리듯 송수화기를 놓아버렸다. 맞은편 책상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묻고 있는 남편에게 멍하니 중얼거렸던 것 같다. “철수가 죽었대요……….”

그는 내 여동생의 남편이다. 다섯 살짜리 지혁이 아빠인 그는 무녀 독남이다. 그는 이 세상을 통 털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편, 하나밖에 없는 아빠,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동서……. 내 남편에게 그가 유일한 동서였던 것처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그는 하나밖에 없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사람이었다. 대체가 불가능한 사람…….

그 일이 있기 일 년 전, 우리 가족이 뉴욕에서 일박한 후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펄쩍거리며 뛰어 오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교 인근에 있는 동생네 아파트는 세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작아 보였다. 그러나 꿈을 향해 뭉쳐있는 세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근처 캠퍼스로 산책을 나갔을 때 무수히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마치 제 것인 양 자랑하던 그, 이따금 사슴이 내려와 목을 축이고 간다는 실개천 가에 고추, 파, 시금치 등을 심어 놓고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던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물고 빨고 주물러 터질 듯이 귀여워 하다가 결국엔 울려놓고 다시 어르고 달래주던 그. 광활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따라 일곱 시간쯤 달려 캐나다의 나이아가라에 닿았을 때 눈물겹게 좋아하던 그…….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리면서 MBA과정을 밟고 있는 그에게 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요 앞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첩첩 산중인 터였다.

떠나오던 날 공항까지 배웅 나온 그에게 나는 아프게 한마디 했다. 부모만이 사랑 해주는 아이는 밖에 나가서 미움을 받기 마련이라는 것. 처음부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확실히 구분해주어야 분별력이 생겨 떼를 쓰지 않으리라는 것.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부모가 없을 때까지를 생각해서’ 절제된 사랑으로 훈육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 지나치리만큼 혹독하게 힐책에 가까운 어조로 부탁하고 충고 했던 것은 조카 녀석의 생떼가 도를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도저히 녀석을 달랠 수가 없자 겁을 주려고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단다. 그런데 언제 누가 신고를 하였는지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각서를 쓰고 나왔단다. 공항에서도 초콜릿이 사단이 되어 공항직원에게 불려가 주의를 받고 온 터였다. 비지땀을 흘리며 생떼를 쓰는 어린애와 지칠 대로 지친 동생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 채 사태수습이 안 되는 그가 딱하기 짝이 없었다. 길게 이야기 할 시간은 없고 곁에서 도와 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모습은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 덩어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짧은 소견에서 나온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 압축된 시간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볼을 부비고, 입맞춤을 하고, 씨름을 하고, 목말을 태우고, 울렸다가는 다시 웃기면서…….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는 사랑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네 살짜리 꼬마 녀석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사랑이란 무조건적인 사랑뿐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내외가 장례식장에 도착하였을 때 동생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제 어미 가슴팍에 안겨있는 조카 녀석도 끅끅거리며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두 모자는 서로 마음 아플 것을 헤아리느라 이를 악물고 미어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어깨에 쓰러지듯 기대며 동생이 말했다. “참 평화로워 보이지?” 그랬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교통사고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전한 그는 이 세상 근심을 모두 잊고 그저 긴 잠에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울지 말라는 듯, 아무 걱정 말라는 듯, 하늘나라가 저의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라는 듯 평안해 보이던 그는, 여전히 잘 생기고 멋있었다.

그에게 예복 정장을 입히던 경험 많은 장의사도 젊은이가 아깝다며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더란다. 그 애도가 지나쳐서 그만 장의사 본인의 양복 뒤쪽을 찢어 입히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민망 해 하더란다.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잠시 안경을 벗어 두었는데 둘 다 검은 정장이어서 착각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전해주는 동생의 입이 반은 웃고 반은 울면서 비죽비죽 비틀어 졌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우리를 오히려 위로하려 애쓰던 동생의 얼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사고가 나던 날은 천둥번개에 폭우를 동반한 사납고 험한 날씨였다고 한다. 악천후 속에 전신주가 쓰러지고 정전이 되어 고개 너머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단다. 고갯마루에서 그 너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채, 외사촌 오빠가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이려는 찰라, 그만 그 아수라장 사이로 돌진하고 말았단다. 외사촌 오빠 내외는 다리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뒷좌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있던 그는 말짱했더란다. 그는 서둘러 차 밖으로 나왔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위중한 것은 그였다. 구급차가 왔을 때 그는 계속 “춥다”고 했고 이송된 병원에서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안전벨트에 의한 장기 파열이었다.

동생은 그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한 것.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주지 못한 것. 안아 주거나 입맞춤 해주지 못한 것.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귓전을 어지럽히고 가슴을 후벼 파는지 동생은 가끔씩 머리를 뒤흔들곤 했다. 다음날 다니던 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있었다. 우리와 외사촌 언니 내외가 가족의 전부였는데 교회 가득 이웃들이 모였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여러 사람에 들려 그가 교회 문을 나설 때 동생은 그를 붙들며 목 놓아 울었다. 어린 조카도 서럽게 따라 울고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 한사코 길을 막아서는 동생을 뿌리치고 그는 황황히 떠나가고 있었다.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 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 갈 내 고향 하늘나라

 

흐느낌에 섞여 찬송가가 이어지고 검은 리무진을 따라 길게 열 지은 차들이 화장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고 그가 생전에 농담처럼 “이 다음 나도 이곳에 묻히고 싶다.”던 그래서 “내 아이들이 소풍 오듯 날 보러 왔으면 좋겠다.”던 공원에는 화사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었다.

건물 한쪽 회당에서 간단한 기도를 바친 후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교회에서부터 울며불며 따라 온 동생은 그를 붙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이 사람 아직 가슴에 못 묻었어! 못 묻었단 말이야!” 자지러지듯 통곡을 하며 자꾸만 그에게 엎어지려 하였다. ‘가슴에 그를 묻다니……. 서른 두 살짜리 가슴에 그를 묻다니…….’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얼마나 결사적이던지 실신지경에 이른 동생은 여러 사람에 이끌려 나갔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니 높은 천정의 복도에 카펫이 깔려 있었다. 길게 이어진 회랑을 지나자 용광로처럼 뜨거운 문 앞에 남편이 서 있었다.

남편이 고른 대리석 함에 그는 고요히 쌓였다. 그의 식지 않은 사랑처럼 따뜻한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남편은 울었다. 그곳에서 출발하여 그의 본가에 닿을 때까지 남편은 검은 가방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친 형제처럼 어울려 동해 바다로, 땅 끝 보길도로 함께 뭉쳐 다니더니, 일 년 전 다녀간 이 길을 다시 되짚어 오게 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러 번 묻고 대답하는 사이 다섯 해가 흘렀다.

셋이 떠난 자리에 차마 둘이서만 올 수가 없다던 동생이 지난겨울에 다녀갔다. 그가 밑줄 긋고 공부하던 책으로 MBA를 마치고 공인 회계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감성지수가 유난히 높은 조카 녀석은 이따금 아빠를 찾다가 울곤 했다. 아마도 이곳에 오면 아빠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기대를 했었나 보다.

“Life is short!” 녀석이 종종 쓰는 말이다. 처음엔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다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불과 열 살짜리가 그 비밀을 어찌 알았을까? 단 한순간에 인생의 비밀을 깨칠 만큼 아리고 쓰리게 겪은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일로 엄마가 속상해 하거나 급히 서둘러야 할 일에 주저한다 싶으면 여지없이 한마디 던지는 것이다.

“Life is short!”

가무잡잡한 피부에 씽끗 웃는 모습이 귀여운 내 조카. 누구 이 아이의 아빠가 되어 주실 분 없을까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아빠로 치던 착한 소년이랍니다. 인생은 짧지만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분, 짧은 인생길에 서로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어 주실 분, 꼭 찾고 싶습니다.

 

《책과 인생》으로 등단 (2005)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시문회 회원.

월간《에세이플러스》운영위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