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수필가의 八十 회고록③|

 

나이를 따라다닌 오솔길

 

김시헌

 

 

20세 때 해방이 되었다. 동네에 있는 넓은 사장砂場에 나갔더니 긴 장대 끝에 무궁화 가지를 묽어 매고 그 끝에 태극기를 달고 동네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국기이고 무궁화는 우리의 국화國花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물어볼 수도 없고, 해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일본의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그때에야 알았다.

해방 전에 나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70리를 북쪽으로 들어간 연진連津이라는 어촌에 가 살았다. 그곳에 삼목합자회사라는 토목공사를 하는 일본인 회사가 있었다.

공업학교 토목과를 나온 나는 졸업하자 직업소개소에서 실시되는 제도사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이 되고, 곧 발령이 났다. 청진제철소 제도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첫 출근을 하니까 출근 시간이 찍혀 나오는 기계에다 이름 카드를 넣고 손잡이를 누르면 철컥 소리가 나고 카드에 시분時分까지 인쇄되어 나왔다. 나에게는 처음 보는 기계였고 그것으로 규모가 얼마나 큰 제철소임을 알았다. 뒤에 들으니 기관차가 60대 있고, 철광석을 고무산古茂山에서 실어 나른다고 했다. 돌에 섞여있는 쇠鐵를 부수고 용광로에 넣어 진짜, 가짜를 구분해 내는 공장이었다.

온종일 제도실에 앉아, 한 장의 기계 그림을 그렸다. 직선, 곡선, 볼드 낫드가 뒤섞인 섬세하고 큼직한 면적의 그림이었다. 그것이 청사진으로 굽혀 나와 현장에서 제품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견습생에 불과했다. 종일 그린 것을 결재실에 가져가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어디 어디를 지적당하고 이튿날 다시 그리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튿날도 그러했고 사흘째도 그러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일 수는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제철소 안의 사정을 하루 한 가지씩 구경했다. 용광로가 어떤 것인가도 그때 알았다. 일주일을 못 채우고 나는 그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알았다.

결근을 했다. 들으니까 그 제도사 직업은 징용령에 의해서 퇴직의 자유가 없음을 알았다. 출근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오고 사람이 찾아왔지만 나는 몸을 숨기고 더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찾은 직장이 삼목합자회사三木合資會社의 기술과였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하루 종일 30리 40리의 현장을 발로 뛰면서 측량사의 지시에 따라 거리를 측정하고, 말뚝을 박고, 그 말뚝 중심에 작은 못을 꽂는 일이었다. 그래도 해방감이었다.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즐거웠다. 일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가면 술을 마셨느냐며 얼굴이 붉다는 것이었다. 온종일 뛰어다니느라 상기가 되어 얼굴이 붉어졌던 것이다. 북쪽의 추운 겨울에도 작업은 쉬지 않았다.

2년을 넘겼더니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전출이 되었다. 연습이 되었으니 토목 설계의 본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2차 대전 끝 무렵에 소련군이 만주에 집결되고 한반도에 쳐내려온다는 소식에 일본은 서둘러 나진羅津 청진淸津 사이에 철도를 신설하고, 회령과 원산 사이에 복선철도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근무한 회사는 바로 그 철도공사를 하청한 일본 사람의 회사였다. 오륙 십리의 거리를 나누어서 하청을 하기 때문에 그 구간 동안에 있는 터널 만들기, 교량 만들기가 기술과의 주업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도 측량기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깃발이나 흔드는 측량사가 되었다. 예정 선에 강물이 나오면 거기에 맞는 교량을 만들어야 한다. 강의 수량水量에 따라 교각橋脚 교대橋臺 의 크기와 높이를 결정하는 표준수치가 있었다. 그것을 그냥 적용하면 되었다. 하청의, 하청을 담당하는 작은 공사 구역이 또 있어 그들이 나무틀을 짜 놓으면 나는 다른 기술원과 같이 나가서 설계도대로 틀이 짜여 졌는가를 일일이 검측한다. 그 검측에 합격하기 위해서 현장의 목공들은 많은 신경을 쓴다.

어떤 때는 더워서 물을 하루 두 되 세 되씩 마셨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되는 철도 공사는 그만큼 정밀하고 규모가 컸다. 예정 선상에서 숲이 나오면 그 나무를 밑둥치부터 모두 베어야 한다. 산이 너무 높으면 산 속에 굴(터널)을 뚫어야 한다. 그러한 기초공사가 모두 기술과의 측량 설계에 의해 진행되었다.     

징병검사에서 나는 제일을종이라는 체격판정을 받았다. 갑종합격자가 소집을 받고 거의 떠나자 제일을종으로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향의 면사무소에 소집영장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나간다는 사건이 그때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고향 마을에서 장행壯行 축하 행사까지 치루고 기다리고 있는데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풀려남이다. 그야말로 나는 직장에서 풀려나고 징용에서도 풀려났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할 일이 없었다. 8·15 해방이 되고 두 달 후에 교원 시험이 있었다. 대구까지 가서 응시했고 곧 발령이 났다. 부임한 학교가 안동군 길안 국민학교였다. 가보니까 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 출석 독려를 다녔다. 그러는 사이 6, 7년이 지나가고 나는 중등학교 교원 검정고시에 응시했다. 합격이 되자 곧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안동중학교였다. 몇 년 후 희망에 의해 대구 제일여중고로 전출이 되었다. 그때부터 문학하는 사람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소설가 윤장근 씨의 소개로 시인 이윤수 씨를 알게 되었다. 체구가 큰 이윤수 씨는 당시 작은 시계수리업을 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찾아가서 대화를 했고, 다른 문인들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문인들 사이에는 중앙문단이니 지방문단이니 하는 차별 호칭이 있었다. 나는 열등감을 갖기 싫어서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수필쓰기에만 전념했다. 수필 세 편을 써서 처음으로 <現代文學>을 주간하던 조연현 씨에게 보냈다. 3개월 후에 나의 글이 게재되어서 책이 보내져 왔다. 그때는 원고료도 같이 왔다. 비로소 나도 중앙문단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여류수필가 이화진李華眞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화진 씨는 그때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장인문 씨를 소개받고 그 뒤부터 세 사람이 앉으면 수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것이 수필동인회를 만들자는 화제로 옮겨가서 「경북수필동인회」가 발족되었다. 창립에 참여한 회원은 10여명이었다. 매월 월례회를 열고 수필이 무엇이냐? 무엇에서 문학성을 찾아야 하느냐 등을 가지고 진지했다. 몇 년이 지나가자 회원 수도 많아지고, 대구에서 또 하나의 수필동인회가 조직되었다. 대구수필문학회라는 명칭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경북수필동인회는 대구를 제외한 경북 일대의 사람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회의를 몇 번 열어서 우리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영남수필문학회」로 폭을 넓히게 되었다. 영남이라면 경상남도까지 포함되지만 당시 부산에도 동인회가 있었기 때문에 경남 사람은 극히 그 수가 적었다.

65세가 되었을 때 나는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둘째 아들이 서울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고, 40년 동안 살아온 대구를 떠나고 싶기도 했다.

서울에 오니 또한 낯이 설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대구에 가서 2, 3일씩 친구를 만나고 와야 속이 풀렸다. 1년이 지나고 서울중앙도서관에서 전화가 왔다. 새로 수필반이 만들어졌는데 강사 일을 보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우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도서관 사람은 박연구 씨에게 강사 이야기를 했더니 나를 소개해 주더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부터 강사가 되어 나갔다. 20여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다. 첫째가 경북 지방의 억센 사투리이고 둘째는 강사가 될 자격이었다. 말은 어쩔 수가 없고, 자격은 경험을 밑천으로 삼았다. 그 뒤 수필반 강사 일거리가 여러 곳에 생겼다.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나갔다. 그 후 약 10년 동안 강사 일에 열중했고, 그 일은 나를 많이 즐겁게 했다. 수필을 써서 제출하면 집에 돌아가서 읽는 일도 재미있고 그들과 수필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20년이 지나간 지금, 나는 어느 덧 80이 넘은 고령자가 되었다. 고령자에게 오는 허탈과 해방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