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⑨  공덕룡편

 

 

 

칼집

 

 

파푸아 뉴기니는 호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아 태어난(1975) 신생공화국이다. 호주의 북쪽 뉴기니 섬을 세로로 직선을 그어 동서로 나누어졌는데, 이 나라는 동쪽에 위치한다. 본섬 말고도 대소 6백 개의 섬이 서태평양에 산재한다. 3백 50만 주민의 상당수는 다습한 정글에 뒤덮인 도서에 살고 있다. 언어는 줄잡아 8백이 넘는다 한다. 고지부족은 화식조火食鳥의 털을 뒤집어쓰고 이 나라 최대의 도시 포트 모레스비의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석기시대와 우주시대 사이, 어느 구석진 망각의 변경邊境의 덫에 걸려’ 이들의 다수는 아직도 원시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독립 후 이 나라의 문화공보부 장관이 한국을 찾았는데, 우리 학교에서 명예박사를 주었기 때문이다. 학위수여에 필요한 이력서, 공적개요서 등을 준비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밟는 과정에서 필자는 몇 차례 이 분을 만났던 것이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곱슬머리, 그런데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었다. 형형炯炯한 안광眼光이 사람을 쏘아보는 눈매이다. 게다가 한쪽 눈 흰자위에는 핏기가 서려 살기마저 느끼게 하였다. 부족의 전통의상(허리에 감은 천으로 앞을 가릴 정도이지만)으로 갈아입고 창을 들고 나서면 용맹한 전사로 탈바꿈할, 그런 인상이었다. 하나 그는 호주에 유학도 했고, 이제는 어엿한 신생국가의 문공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서지방에서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냥을 하고, 부족간 싸움질이 벌어지면 살육도 예사라 한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어떤 부족들은 사람의 목을 따서 제단에 바치는 구풍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엔 그런 식인행위는 없어졌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재래의 무기인 활, 창, 곤봉 대신 총포를 사용하므로 인명의 손상이 크다고 한다.

학위수여가 끝나고 장관은 프라자호텔 22층 홀에서 연석을 베풀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학교 측에선 총장을 비롯 몇몇 보직교수, 한국문공부의 고위관리, 그리고 주한 외교사절달의 몇몇 인사였다.

우리나라와는 국교를 연 것이 1976년이고, 그 뒤를 쫓듯 북한이 국교를 맺었다(1977). 지하자원은 막대하고, 반갑게도 친 서방 정책을 채택하였다니 우리로서는 귀한 손님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한국에서는 처음 맞는 장관이니 명예박사를 줄 만한 사람이다.

식사가 끝나고 여흥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한국식을 따라야 할 것인즉, ‘사회자는 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를 지명하여 그 나라 고유의 노래를 한가락 뽑으라 하였다. 말이 떨어지자 그는 반사적으로 일어나더니 왼손에 접시, 오른손에 포크를 잡았다. 나는 얼핏 방패와 창을 잡은 왕년의 전사를 연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포크로 접시의 등을 치며 장단을 맞추더니 노래가 우렁차게 퍼져 나왔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힘찬 가락으로 보아 전투에 앞서 소리 지르는 전사의 포효 같은 것이었다. 뒤이어 터져 나온 박수소리는 그를 싸움터로 보내는 갈채 같은 것이었다.

주인이 먼저 한 곡을 뽑았으니 다음은 당연히 우리 측의 답가答歌가 있어야 할까 보다. 술도 별로 안마시고 굳은 표정의 한 손님(그는 우리 문공부에서 나온 분이었다)을 지명하였다. 그는 노래에 앞서,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18번이니 여러분은 자세를 바로잡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고 조건까지 붙였다. 어찌 보면 대통령의 권위를 빈정대는 말투 같기도 하고….

야당인사가 이런 소리를 하면 가시 돋친 유머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정부를 대표하는 문공부 공무원의 말이니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곡목은 저 유명한 「황성 옛터」. 분위기를 보아 이 말은 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 통역을 생략하였다. 건너편 테이블의 미 대사관 직원이 나를 보고 히죽 웃는다(그는 말귀를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충성심도 이 정도가 되면 일품이라 빈정댄 것이나 아닌지).

파티가 끝나고 그의 방에서 선물 한 개를 받았다. 상자를 열고 종이를 벗기니 물소 뿔이 나왔다. 물소 뿔은 한우 뿔보다 배나 길다. 겉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속은 곱게 문지른 표면에 부드러운 헝겊을 몇 겹으로 도배해 놓은 것이었다. 뿔의 밑둥에는 구멍이 두 개 마주 뚫렸고 색색의 노끈을 꼬아 만든 띠로 두 끝을 구멍에 동여매 놓은 것이다.

“그것 뭣에 쓰이는지 아시겠소?”

“벽걸이로 아주 훌륭한 장식이로군요.”

“원래는 남자의 소중한 물건을 꽂아두는 집이었소.”

“집이라니?”

“사냥 나갈 때 혹은 전투할 때 혹시나 다칠세라 그 속에 넣고, 띠로 허리에 묶었던 것이오.”

나는 그 쇠뿔을 사진에서 본 일이 있었다.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어느 날 오후, 언덕 위에 도열한 장년의 무사들. 이제부터 사냥 길을 떠나는지, 혹은 싸움터로 나가는지, 활과 창으로 무장한 벌거숭이 무사들. 저마다 사타구니에 뿔 한 개씩을 차고 있다. 열 지어 있는 그 모습은 기이하고도 충격적이었다.

“남자의 소중한 것을 칼에 비유하면 칼집이 되겠군요.”

“기가 막힌 비유인데! 집에 가서 공교수도 차보시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욕실 문을 걸고, 조심스럽게 칼집을 씌워 보았다. 그런데 칼집 사이즈가 너무 크다. 헐렁하다.

‘역시 벽걸이나 해야지.

’ 이튿날 그를 만난 자리에서 그 말을 하니, 장관은 박장대소를 하며,

“쌍방울을 넣지 않으셨군(그의 표현은 ‘two balls’였지만 상스러운 말을 글에 담을 수 없으니…). 또 좀 크다 싶은 게 좋소. 혹 부풀지도 모르니.”

‘한국에는 '대장부가 한번 칼을 뽑으면…’이라는 경구가 있소. 잠자리에서 거사 직전에 칼을 해는 동작을 하면 드릴 만점이 아니겠소. 심리적 효과도 클 것이오.”

장관은 또 박장대소하였다.

독자 여러분, 칼이 무기냐 아니냐의 구별을 아십니까? 일본도는 물론 무기고, 단도도 무기입니다. 그러나 단도보다 큰 부엌칼은 무기가 아닙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앞의 두 칼은 칼집에 꽂혀 있는데, 후자는 도마 위에 맨몸으로 드러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칼자루를 손에 쥐고 쑥 빼는 시늉만 하여도 무기로서의 효과는 100퍼센트입니다. 칼집이 있는 칼만이 무기라고 단정한 미군 검찰관이 있었습니다. 미군정 당시 불법무기 소지자로 군정 재판에 선 피고가 있었습니다. 피고의 변호인은 만일 단도가 무기라면 한국 가정에 무기 없는 집이 한 집도 없을 거라고 논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검찰관은 부엌의 식칼은 무기가 아니라고 그럴 듯하게 반박하더군요. 칼집에 꽂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칼집의 효과를 알 수 있으시겠죠. 벽에 걸어두면 한낱 장식품이지만 그 안에 칼을 감추면 무기가 된답니다.

 

 

수염

 

 

수염을 한번 길러 보았으면…. 그런 생각을 품어본 일은 없었다. 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젊었을 때는 젊었으니 그랬고,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보다 늙어 보일까 해서이다.

요즘 젊은이 가운데는 콧수염을 기른 친구가 더러 있는데 눈꼴사납다고 생각하는 노인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수제자가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왔는데 - 설마 박사학위의 징표로 삼을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 코밑에 수북이 수염을 달고 옛 스승 앞에 나타난 것이다. 노스승은 그날부터 우울해지기 시작하였다. 약속대로 자기의 강좌를 물려주고 자신은 물러나려 하였는데, 그 콧수염이 마음에 걸려 노교수는 강당을 떠나지 못했다.

하루는 제자를 불러 마음 모질게 먹고 수염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수염 깎게!”

제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씁쓸한 얼굴로 돌아갔다. 노교수는 속으로 이제는 그 콧수염을 깨끗이 밀어버리고 옛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리라 - 그렇게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는 옛 스승의 간절한 소망을 콧수염으로 덮어버리기나 한 듯 여전히 선선한 얼굴로 강당에 서곤 하였던 것이다.

노교수는 원래 수염의 숱이 적은 데다, 이제는 나이에 밀려 빠지고 바래고 했지만 아침마다 면도를 대는지 가까이 보아도 횐 털 오라기 하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의 결벽성이 이러하였으니 제자의 콧수염으로 해서 심중에 화기가 일 법도 한 일이다. 그 후 노교수는 어이없이 세상을 떠났다. 재작년 일이다. 주위 사람들은 심화병心火病이었을 것이라고 그럴 듯한 풀이를 하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수염과 사람 팔자’라고나 할, 좀 거창한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첫 사람은 ‘유수피화有鬚避禍’라 하였다. 난중 수염 기른 덕으로 징병을 면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면 평화기에 유수有鬚면 어떤 덕을 보는 것일까? 철학자나 예술인 그리고 무슨 도술인道術人 같은 자유인은 모를까, 관청의 계장이 수염을 고집하면 권고 사직 감으로 볼 것이다. 윗사람 앞에선 - 윗사람이 유수有鬚인 경우를 제외하곤 - 역시 무수無鬚가 도리인 듯싶다. 이것이 한국의 모럴이다.

철학자나 예술인, 도술인이라 하더라도 수염을 무슨 권위의 징표로 삼으려 하면 역시 눈꼴  사납게 비치는가 싶다. ‘철학자를 만드는 것은 수염이 아니다’라고 영국의 저명한 성직자 토마스 풀러가 일찍이 갈파한 바 있다. 그의 사진을 찾아보니 예상대로 역시 수염은 없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만일 수염을 기르므로 무슨 지혜가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염소도 플라톤이 될 수 있다(루키안).’

그런데 그 염소는 지혜는커녕 수염 때문에 슬퍼진다고 한 사람이 있다. ‘수염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나는 수염을 길러본 일이 없다. 두발은 더부룩한 채 빗질도 별로 안하지만 수염은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깎는다.

전기면도기로 애벌을 밀고 남은 털은 안전면도로 깎는다. 스킨로션을 턱으로부터 목덜미까지 TV의 화장품 광고쟁이 탤런트같이 비비고 문지르고 나면 그 향긋한 냄새로 해서 나의 아침은 행복하다.

저녁 파티에 나서기 전, 신사라면 또 한 번 깎고 문지르고 해야 할 것이다. 숙녀와 맞춤을 추다 뺨이 서로 닿거나 턱으로 이마를 스치거나 하면 그것만으로도 실례가 될 터인데 갓 돋은 고슴도치 털로 비벼서는 안 될 것이다.

영국 신사의 첫 조건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경우이고 수염만은 깨끗이 미는 일이다. 아침저녁으로 수염을 깍지 않으려면 아주 길러야 한다. 그 양쪽에 두 다리 걸치고 그 중간을 택하면 두 진용이 합세해서 공격할 것이다. 이 경우에만은 '중용'은 통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때, 영국군 한 소부대가 몰살당한 일이 있었다. 시체 가운데 수염이 돋아난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전투중이라 하더라도 매일 한 번씩 수염을 깎도록 부대장은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수염에 얽힌 미담이다.

나는 이발소 의자에 누우면 눈을 감고 면도사에게 운명을 내맡긴다. 불안은 조금도 없다. 섬세한 손에 쥐인 시퍼런 칼날은 깃털같이 사뿐히 내려와 살갗을 스친다. 귓바퀴 홈진 곳, 그 미묘한 선을 따라 솜털 하나 남기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천사의 손'을 연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나폴리에 갔을 때, 처음 찾아간 대학 골목 안 이발소는 영 사정이 달랐다. 의자는 두 개뿐이었다. 중늙은이 주인이 가위와 빗을 들고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대강대강 머리를 치더니 대기하던 면도사에게 넘긴다.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 면도사는 가죽 띠에다 칼을 쓱쓱 문지르더니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가왔다. 이제 와서 그만두라 할 수도 없어 하는 대로 맡겨두었지만, 그 거친 손길을 꾹 참으려니 눈에는 물이 고이고….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나도 수염을 길러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에선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두 사람에 한 명꼴로 수염을 기른다. 신입생 가운데는 쿠바의 카스트로 같은 수염도 있었다. 담장 기어 올라가듯 힘차게 뻗어 올라가는 수염이다. 영화에서 본 네로 왕 같은 턱수염도 있었다. 북구 남성의 누렇게 바랜 수염이 아니고 모두 검고 탐스러운 수염들이다. 이런 얼굴들 앞에 서니 나의 민짜 얼굴을 가지곤 교수의 위신이 설 것 같지 않았다. 콧수염을 기르기로 작심한 것이다.

볼과 턱은 면도로 밀고 코밑은 가위로 다듬고 하였다. 숱이 많지 않은지라 폴란드의 자유노조 위원장 바웬사의 위엄을 따를 수는 없지만 가위로 윗입술의 선을 따라 가지런히 다듬으며 삼면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한 세대 전, 클라크 케이블의 콧수염을 아주 닮지 않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신통한 일은 두발과는 달리 흰털이 거의 없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발보다 한 20년 후에 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두발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렸지만 수염은 아직 인생의 조락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이르다고 확신을 주었다.

해가 바뀌고 5월 들어, 아내를 맞으러 로마 레오날드 다빈치 공항에 나갔다. 7개월 만에 만나는 재회였다. 아내는 물끄러미 내 코밑을 보곤 별 코멘트는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와서 수염 기른 남자들을 많이 보니 아내의 안목도 높아져 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결론은 역시 깎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기를 수염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나의 콧수염의 수난은 한국에 돌아와서부터이다. 만나는 친구마다 한마디씩 수염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서 그런 눈치가 보이면 이쪽에서 먼저 꺼내기도 하였다. 허물없는 여자교수에게 ‘수염을 기르니 성적 매력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성’자는 빼고 '매력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없다’쪽으로 들린다.

가을에 접어들어 소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내 수염도 쓸쓸해 보였다.

어느 날 아내와 생선가게에 들러 흥정하는 도중, 주인아주머니는 아내를 ‘아주머니’라고 부르고나서 나보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로 깨끗이 밀어버렸다.  

 

해설         

 

강 호 형

 

 

자주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긴장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가끔 만나지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공덕룡 선생은 나이로나 경륜으로나 나로서는 의당 어렵게 모셔야할 어른이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편히 대할 수 있는 선배 중의 한 분이었다. 우람한 체격에 걸맞게 넉넉하고 유순하면서, 격식이나 범절을 따지지 않는 개방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자리가 아니면 늘 캐주얼 차림에, 술 담배를 즐기면서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여 소문난 요조숙녀나 꽁생원의 입도 열릴 만큼 희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분위기메이커였던 터라, 외출할 때마다 부인으로부터 “제발 주책 좀 부리고 다니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고 나오노라고 실토한 적이 있을 정도로 편안한 분이었다.

선생은 영문학자이면서 수필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따라서 그 방면의 이론에 누구 못지않게 밝았지만 정작 본인의 수필에서는 그런 내색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분방한 사고,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수필은 캐주얼 문학이다”

“수필은 칵테일 문학이다”

즉, ‘형식에 억매이지 않아 편안하되 정장보다 멋스러운 옷’, ‘여러 가지 재료를 취향대로 섞되 정통 술보다 향기롭고 맛이 좋은 칵테일’ - 이것이 선생이 추구해온 수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당신의 세 번째 수필집 《웃음의 묘약》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웃음을 칵테일에 비유하곤 한다. 바텐더에게 그가 만든 술을 화학적으로 분석하라 하는 것은 무리이다. 술의 종류와 배합 음료만 가려내서 손님의 취향에 맞추어 감을 잡아서 배합 량을 조절한다. 맛있으면 됐지 분석은 해 무엇 하랴.”

여기에 소개하는 두 편의 수필도 선생의 그런 수필관이 드러나 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해학적인 수필을 쓰고자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