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론|

 

혼합과 합성

 

김형진

 

 

혼합混合과 합성合成이란 말이 있다. 이 두 말은 표면적으로 보면 비슷한 듯싶지만 영판 다른 말이다. 혼합은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을 섞어 놓은 상태로 섞인 물질들의 성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요, 합성은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섞여 새로운 성질의 물질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합성은 화학작용에 의한다. 아무리 여러 가지 물질을 섞어 놓아도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분야에 따라 표현수단이 다를 뿐 모든 작품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내면에는 그가 타고난 재능은 물론 그가 살던 시대적 개인적 환경, 그의 사람됨, 그가 습득한 예술적 기량 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선택한 소재와 합성하여 표출될 때 그 작품이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수필로 돌아가자. 수필에 대한 논의 중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 소재와 작품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일상적인 체험을 그대로 기록해 놓으면 수필이 된다는 미숙한 견해. 이는 수필이 문학예술이기를 포기한 위험한 발상에서 비롯된다. 수필이 문학의 5대 장르 중의 하나인 이상 문예적 장치(표현기교, 구성 등)를 배제한 단순한 체험담이나 설익은 사설일 수는 없다. 수필이 문학의 5대 장르로서 그 위상을 바로 세워 현대문학을 이끌어갈 수 있는 바탕을 다지기 위해서는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수필만의 문예성을 획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개울가에서 ; 물과 함께 물같이 생각에 잠기면…-김열규-’의 주된 소재는

 

‘우리 집 뒷산, 태산이야 될까마는 제법 크고 우람한 좌이산’

 

에서 흐르는 개울물이다. 이 작가는 매일같이 이 개울물을 대하며 살아온 듯하다. 그래서 계곡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물소리와 물결이 작가의 내면에 독자적인 형상을 구축해 놓았다. 흐르는 시냇물은 시류에 따라 변하는 범인으로, 고여 있는 맑은 물은

 

‘차야말로 물의 수진水眞이라고’

 

일깨워준 초의 선사를 닮고자하는 자아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개울에는 사연이 많다. 높은 골짝에서는 짭짭거린다. 좁은 비탈에서는 재잘거린다. 깊은 늪을 지나갈 때면 웅얼거린다. 바다가 가까워지면 조용조용 수런거린다. -서두-

개울 바닥에 내려선다.

물에 손을 담근다. 우선 이마를 물기로 적신다. 차갑다. 시원하다.

그리곤 두 손바닥에 나는 내 나름으로 진수를 받아서 마신다.

“홀짝”

마음에도 진수가 흐르게 해야 할 테지만 그건 내게 쉬울 수가 없다.

나로선 다만 입술 축이고 목 안 적시는 걸로 고작이다. 그 나의 진수 찾기 진수 구하기다. 오늘도 바야흐로 해거름 때, 목을 적시다 만 나의 진수 떠가서 차 한 잔 달일 것이다. -결미-’  

 

흐르는 개울물에서 인생의 여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문예적 기량이며, 고여 있는 물에서 초의 선사의 수진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깊은 사유로 닦인 작가의 인격이다. 산뜻한 간결체 문장이 상당 부분 지루함을 삭감해 주기는 하나 좀 더 간추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백목련 피는 뜻은-고임순’의 주된 소재는 남편과의 사별이다. 2007년 8월 17일 새벽 50년 세월을 동고동락하던 남편이 하늘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 여름은 한 줄기 빛을 갈망하는 어두운 동굴이었다. 실의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참회의 칼날에 가슴패기를 난도질당하는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 가을은 허허로운 광야였다. 동굴에서 탈출하여 만난 광야에는 나뭇잎이 나부끼고 억새가 무성하고 안개가 자욱하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곳. 그러나 때로는 포근함을 안겨주는 호수, 오열을 삼켜주는 파도, 응어리를 토해낸 절규를 받아주는 바다를 만날 수도 있었다. 눈 덮인 겨울은 다시 찾은 화선지였다. 평생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주던 화선지 앞에서 붓을 들고 몰아지경에 빠져 김상용의 <향심> 이백의 <송운> 송강의 <사미인곡>을 절규하듯 온 몸으로 눌러 쓰고 또 썼다. 어느덧 봄. 그 봄은 깨달음이었다. 독실한 신심信心이 안겨다준 깨달음―.

 

‘눈앞에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예온 출판사’는 남편과 더불어 내 오랜 꿈이었다.

단 한 번, 한순간이라도 목숨 걸고 도전해보고 싶었던 일이 아닌가. 이 생명 다하도록 유지를 받들어 남편 몫까지 사는 것이 진정 승리의 삶임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목련꽃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곱다. 봄은 목련이 피지 않으면 봄이 아니다. 함께 가자고 꼭 잡았던 손을 이제야 놓아준 남편이 꽃으로 피어 웃고 있다.’  

 

 작가가 본인이 당한 애경사를 소재로 수필로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매몰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흑 같은 동굴을 지나 광야를 떠돌며 절규하고 화선지 앞에서 코피를 흘리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 시련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남편의 몫까지 사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는 사랑의 승리이기도 하다.

수필은 작가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사연들을 충분히 다독이고 삭이는 아픈 과정을 거쳐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준 교본이다. 시련과정을 계절의 특성과 결부시켜 표출한 것은 작가의 예술적 기량이다. 그러나 아직도 덜 삭인 감정의 응어리가 더러 감지되는 점이 아쉽다.

 ‘근심을 풀다-김명규-’의 소재는 설사다. 외출 중, 그것도 길에서 터진 설사는 누구나 몇 번씩은 당해본,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렇다고 내놓고 이야기하기도 좀 혐오스런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용기와 거기에 작가의 내면을 투영해 내는 작가의 기량이 눈에 띈다.

 

‘아슬아슬한 쾌감, 안도의 깊은 숨을 몰아쉬며 포근히 쾌감 속에 안겼다.

오그라들 것 같던 전신의 힘을 내렸다. 승리의 깃발을 거머쥔 승자와도 같이 쾌재를 부르는 내장. 스르르 눈꺼풀이 풀린다. 평안과 함께 찾아온 이 환희. 여기에 당도하기 전까지, 품고 있었던 사욕까지도 몽땅 쏟아져 나온다. 글 잘 쓰는 아무개에 대한 시샘도, 평창동 친구네 으리으리한 저택의 아른거림도 햇살에 걷히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지금 나는 반야정관에 달한 사람이다. 청빈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나의 것이다.’

 

설사가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생리적인 현상인 이상 누구도 이를 거역할 수는 없다. 사욕도 버려야 할 것이지만 인간인 이상 누구도 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설사 쏟아냄이 사욕까지 쏟아냄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이런 관계를 약간의 과장을 섞어가며 능청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동생한테서 들은 이야기-집들이 하는 시누이집에서 일손을 도와주고 밤  늦게 귀가하던 중 설사가 급해졌다. 화장실을 찾을 수 없어 은행 현금지급기 코너에 들어가 신문지를 깔고 실례를 했다. 신문지를 접어 오물을 쌌다. 마을버스를 타야하기에 정성들여 싼 오물을 들고 정류소로 향하는데 뒤에서 달려온 오토바이가 획 낚아채가 버렸다.  여기서 오물은 곧 돈이 된다. 과잉욕망이 설사한 오물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돈이며, 이 돈은 다시 설사를 일으켜 오물로 배설된다. 고통(근심)의 악순환인 것이다. 이는 사회에 대한 풍자이다. 작가는 여기서도 겉으로는 박장대소하며 능청을 떤다.  

혐오스런 소재나 평범한 주제의 글도 작가의 문예적 기량에 따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장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허기증-신명희-’의 주된 소재는 허기이다.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생리적 허기를 그려내고 있다.

 

‘그득히 차려진 밥상 앞의 포만감은 잠깐일는지도 모른다. 음식알갱이들이 부서지고 으깨지며 침과 함께 섞여서 혀를 자극하는 순간의 기쁨. 그 짧은 쾌감 뒤에는  여러 단계의 노역이 기다린다. 기쁨의 알갱이들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서 줄어들고 자루 같은 밥통 속에서 위산과의 씨름으로 거의 소멸된다. -중략- 알갱이들이 줄어들면서 기쁨이 고플 즈음에 야릇한 허기란 놈이 슬금 다시 살아난다. 위가 비어서 고플 때 줏대 없는 내 마음도 허기를 느낀다. 위에도 마음에도 착 붙어 다니는 스토커의 정체는 만성위염보다는 허기증이다.’  

 

작가는 위장염胃腸炎 일으키는 공복 시의 속 쓰림을 허기증으로 규정한다. 이는 포만 뒤에 오는 생리적인 허기를 정신적인 허기로 연결하기 위한 장치이다.   

후반부에서는 정신적인 허기를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동창생 중 그중 잘 나가는 친구가 술자리에서 한 ‘나는 정말 운이 없는 사람이라네. 이제껏 제대로 풀린 일이 한 번도 없다네. 올해부터 대운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부터 기대해도 좋네.’라는 말에서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활활한 열정으로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성성한 머리칼 사이로 허연 허기를 흘러내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숯덩이는 지난 시간 속에서 삼천 도의 온도로 제 몸을 태웠는데 그 뜨거움을 기억하지 못한다. 가마 속 참나무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불타는 참나무로 영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시간을 거슬러 숲 속 참나무로 돌아갈 수는 없다. 누구나 살아온 시간만큼 숯이 되어 있다. 재가 되지 않고 숯이 된다는 것은 타지 않고 남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뜨거웠던 시간들은 사위어지고 은근한 화롯불로 불붙이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숯들에게는 허기의 시간이다. 그러면서 그 불안한 시간을 붙든다. 삶의 모호한 허기를 채우려는 싸움을 계속하면서.’   

 

지나온 삶에 대한 허무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배어 있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묘사와 유추를 통해 실감 있게 드러낸 표현과 표면에서 내면으로 이어지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이는 참신한 작품이다. 그러나 허두에서 제시한 공복 시의 속 쓰림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후반부에서 숯이 갖는 내재적 의미를 흐리게 할 우려가 있다.   

수필도 변해야 한다. 일상적인 체험을 작가의 문예적 의도 없이 잘 다듬은 문장으로 써 놓으면 수필이 된다는 미진함에서 탈피함은 물론, 시, 소설과 구별되는 장르적 특성을 살리면서 문예성을 높여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실험이 필요하다.

이고운의 ‘짝젖’은 이러한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과감하게 취한 소재를 자유로운 상상을 통하여 형상화한 면은 우리 수필이 문예성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 생활에서 건진 철학적 사유나 미감을 비교적 평이平易한 어휘를 구사하여 형상화했을 때 좋은 수필이 생성된다는 수필의 특성에 비추어볼 때, 개성적인 상징이나 고차원의 은유로 인한 난해성은 시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이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수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며, 이 같은 변화가 자극이 되어 수필의 새 지평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