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伏들이 산간의 하루 그리기

 

김진식

 

 

하늘이 울고 비가 쏟아진다. 초목들이 싱그럽다. 초복이다. 더위 대신 ‘갈매기’1)가 비를 몰고 왔다. 지붕을 덮은 콘테이너, 차라리 움집이라는 것이 제격이지만 창이 나 있어 살아 있는 자연을 보고 듣는다.

너무 엄청나서 감동이 없다. 거저 멍청하게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겹다. ‘갈매기’가 잠시 비를 거두고 구름을 비켜선다. 햇빛이 나고 풀과 나무들은 지칠 줄 모른다. 잠자리가 날고, 새들이 깃든다.

채전은 풀밭이다. 씨만 뿌려놓고 가꾸지 않는다면 잡초가 우거진다. 세상의 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풀을 뽑는다. 겨우 몇 뼘의 땅인데 땀을 적신다. 쉽게 가꾸는 것이 아닌 것인데 주말 일손이 이렇게 만들었다.

농사일은 작은 것이라도 제때에 돌보지 않으면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상주常住하지 않은 주말농장은 헛소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낙향을 채비하고 있으니 힘든 일은 물리더라도 텃밭에 가꿀 남새들조차 관심 밖일 수는 없다.

산간으로의 낙향은 무엇보다 자연과 함께 하기 위해지만 산간의 집이라고 반드시 자연을 아껴 들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산으로 에워싸여 있지만 산이 삶의 공간까지 감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가까운 산에서도 캐 심고 나무시장에서 구하여 심은 것이다. 그러나 원예나 조경에 문외한이라 구색을 맞추거나 전정으로 다듬지 않아 자연 그대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이런 모습이 좋다. 값 비싼 어려운 나무를 들이기보다 가까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좋고, 가위질로 가지런하게 손을 본 것보다 아기자기한 맛은 덜하더라도 자연그대로 자란 것에 정이 간다.

그러나 구색이 아쉬운 것도 있다. 암수로 일가를 이뤄야 할 나무가 그렇다. 어느 한쪽으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은행 한 그루는 수나무다. 암나무 한그루를 곁에 심어주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가래나무라고 심은 두 그루 나무가 몇 해째 꽃을 피우고 있지만 열매를 달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르기를 ‘수꽃밖에 피우지 않으니 그렇지’ 하고 지나간다. 가래나무도 암수가 일가를 이룬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 뒤 설악산 오색약수터 근처에서 암수의 가래나무를 발견한 일이 있었다. 열매를 단 암나무가 양옆으로 흰 꽃을 단 수나무를 거느리고 있었다. 우리 밭의 총각가래나무의 처지와 비교되었다. 터를 잡고 살게 되면 수목원을 뒤져서라도 암나무를 구해 일가를 이뤄주고 싶지만 기약하기가 어렵다.  

나는 지금 나무를 살펴보며 교감하고 있다. 키가 훤칠한 귀티의 노각나무가 열매를 달고 있다. 달포 전 만하더라도 훈장처럼 흰 꽃을 달고 뽐내던 모습이 선하다. 지리산이 고향이라지만 지금은 정원의 귀빈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노간주나무는 기울어진 언덕을 지키고 있다. 가지가 무성하고 봄엔 꽃으로 보답한다. 구슬처럼 매달린 열매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산수유 청매·홍매도 시샘을 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무궁화동산이다. 다섯 그루가 반원을 그리며 동산을 만들고 있다. 꽃이 크고 잎 새도 깨끗하다. 평소에 갖고 있는 병든 무궁화의 인상을 깨끗이 씻어주고 있다. 그야말로 ‘무궁화 대훈장’이 자부심과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처럼 국화國花에 대한 뿌듯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꽃이든 사람이든 건강하고 아름답고 기품이 있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주목, 단풍나무, 오갈피나무, 앵두나무, 철쭉, 골담초, 사철나무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역시 장수 격은 키큰나무의 몫이다. 오동나무, 벚나무, 산뽕나무가 요소요소에 서서 자연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동나무는 언덕에 서서 굽어보고 있다. 봉황이 앉으면 동화桐華의 기를 모은 길조라 한다. 봉황은 오동나무의 열매만 먹는다지 않은가. 가을 달밤 지는 잎 새의 틈새로 깃드는 봉황의 상상은 참으로 화사하고 벅차다. 벚나무는 두렁을 지키고 있다. 수세樹勢가 무성하여 자신감을 떨치고 있어 든든하고 버찌가 익을 무렵이면 새들의 출입이 잦다. 남쪽자락의 한가운데는 산뽕나무 한 그루가 일산을 펼친 듯 정자나무 노릇을 한다. 나는 산뽕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곧잘 오수를 즐긴다. 바람이 깃들며 속삭이고 매미가 한껏 목청을 높인다. 오디 철에는 온갖 새들이 나들이한다. 산뽕나무의 오디는 잘지만 달고, 한물이 가면 다음 물이 익어 오래 지속된다.

나는 지금 산뽕나무 아래서 바람결에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흰 구름 저편에서 찾아오는 계절과 세월의 몸짓을 찾으며 삶을 깨쳐보려 한다. 무심한 구름이 흐르고 다시 먹구름이 천둥번개를 거느리고 비를 몰고 온다.  

복더위도 ‘갈매기’의 위력을 어쩌지 못하고 비켜 서 있다. 자연의 조화다. 그것을 보기 위하여 눈 밖의 눈을 밝히고, 그것을 듣기 위하여 귀 밖의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깨치기 위하여 생각 없이 멍청하게 대자연에 든다. 여름 산간의 무위無爲, 그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