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방의 돌

 

김지수

 

 

자정이 다된 시간에 전화벨이 울린다. 작은아이다.

멀리 이국땅에서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맑고 밝다. 설친 잠에 책을 들었으나 어렸을 적 튼실했던 모습은 간곳이 없고 북어같이 마른 아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아이와의 어렸을 적 기억들이 잘 정리된 사진첩처럼 뚜렷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경계선도 없이 넘나들더니 아예 잊고 있었던 영어 선생님의 얼굴도 겹쳐 떠오른다.

나의 영어 선생님, 그는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지어야할 농토가 많았음인지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시골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십리쯤 떨어진 시골집에서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으며, 짐받이엔 늘 도시락이 실려 있다는 것과 정장차림의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언제나 둘둘 걷어 올린 셔츠차림이었다는 것이다. 열세 살 소녀의 눈에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농부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의 오후 수업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유학시절에 보았다는 ‘노방의 돌’이라는 영화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목도 내용도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을 키우며 애태우는 부모 이야기로 기억된다.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야단을 칠수록 빗나가기만 하는 아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채찍하며 벌을 가했다는 얘기다. 반항만 하던 자식이 그제야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용서를 빌었다는 얘기였다.

그 당시, 이야기를 해준 선생님의 뜻을 헤아릴 수는 있었지만 실감하진 못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비밀스럽게 간직한 풋사랑의 사연처럼 마음한구석에 자릴 하고 잊히질 않았다.  

작은아이는 상당히 낙천적이다. 매사에 별로 걱정 없이 태평하다. 아이가 초등학교 육 학년 때의 일이었다. 방학이 되면 반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서로 집을 오가며 하루 밤을 같이하게 했다. 그것이 아들에겐 퍽 즐거운 행사였나 보았다.

그 일이 빌미가 되었을까. 친구 집에 다시 놀러간 아이는 말없이 자고 온 일이 있다. 아들의 행동을 보려고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나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짧다는 여름밤이 그 날은 왜 그리도 거북이걸음을 하던지….

이튿날 오전11시쯤, 현관 밖 복도에서 여유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걱정 하나 없이 태평한 얼굴로 “엄마, 다녀 왔어요” 하며 작은아이가 들어선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안방으로 들어오라 명령했다. 손에는 기다란 나무 구두주걱을 쥐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분위기에 새파랗게 질리는 눈치다. 순간 겁에 질려 “엄마 왜 그래?”목을 끌어안는다. 애교어린 아들의 행동에 어찌 갈등이 없었을까. 허나 아이를 돌려세우고 종아리를 힘껏 후려쳤다. 몇 번인지 기억이 없다.  피멍이 들었다. “너를 잘못 키웠으니 어미도 자격이 없다”며 나의 종아리도 후려쳤다. 아이보다 적은 양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는 놀라 울지도 못하고 다시는 안 그런다며 구두주걱을 빼앗으려 했다.

아들이 울면서 하는 말은 집에 전화를 했으나 엄마가 받질 않았다고 한다. 그 집에선 가끔 잤기 때문에 야단맞을 줄 몰랐다고도 했다. 허지만 나는 아이에게 세상은 변명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과 더욱이 안이함에 빠져 살 수 없음을 가르쳐야만 했다. 세상을 자로 잰 듯 살수는 없다. 하지만 매사에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 바꿔지지 않는 나의 생각이다.

인도출신의 생태 운동가이며 교육자인 ‘사티쉬쿠마르’의 어머니처럼 자식들에게 “꿀벌을 보며 그 생태를 배워야 한다. 꿀벌은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따지만 어느 꽃에도 해를 입히지 않고 꿀을 조금씩 따 모은다.” 라든지, “자연은 부처나 예수, 모하메드 간디보다 위대한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스승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라는 훌륭한 말은 들려주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이 잘 했을 때나 잘못했을 때에 가슴에 꼭 품어주었을 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도 그렇게 밖에는 표현하지 못했다. 단 한번이지만 지독히 후려친 아이의 종아리는 보랏빛으로 피멍이 들어 그 더운 여름에도 짧은 바지를 입히지 못했다. 그 작고 어린 것을….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내 가슴은 더 시퍼렇게 멍이 들어 가을이 다 가도록 지워지질 않았다.

아들은 지금 파리에서 6년째 살고 있다. 대학졸업 후 유학하여 학위를 받고 직장을 갖게 되었다. 아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유난히 토속음식을 좋아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현지음식에 익숙하질 않다. 계절이 바뀔 때면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을 한다. 너무 튼실하여 한 돌이 되어 제형에게는 먹였던 한약을 거른 것이 때마다 마음에 걸린다.

어렸을 적, 절대 불량식품을 사먹지 말라고 당부하던 나에게 입을 빨갛게 물들이고 와서는 엄마가 준돈으로는 그것밖에 사먹을게 없다던 녀석, 이담에 전봇대가 되어 젤 큰사람이 되겠다던 녀석, 초등학교 입학 무렵 노는 것을 좋아하여 학교에 가지 않는 개를 부러워했던 아이, 할머니가 주신용돈 100원으로 산 목걸이를 대문 앞에서 걸어주던 아들….

노방의 돌! 여학교 시절 비오는 날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리도 잊히질 않았던 것은 자식을 키우며 실행하라는 의미였을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도 내게 보석이 되어 살아있다. 이제야 선생님이 궁금하다. 스승님은 아직 살아계실까.

이 사실을 알면 “자네에게 벌써 그리 큰아들이 있단 말이지?” 하며 손을 꼭 쥐고 빙그레 웃어주실 것 같은 편안한 선생님의 얼굴이, 또 열세 살 소녀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운 밤이다.   

 

《창작수필》로 등단(1996).

(주) 프로써트 홍보이사 역임.

저서 《곁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