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바다

 

김녹희

 

 

이틀쯤 지나고나니 이제야 우리 동네와 주변의 시끌벅적함이, 풍경이 익숙해진다. 참 우스운 일이다. 겨우 며칠 동안 호주 바닷가에 머물다 와서 수십 년 살아온 곳이 낯설어지다니….  

호주 북동쪽 바닷가의 도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아주 작은 도시 타운스빌에 갔었다. 7년 만이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한동안 지냈었기에 곳곳에 추억이 담겨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조용하고 변화가 없던 거리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미국 서부영화의 셋트장처럼 나무 발코니가 달린 나지막한 선술집들은 번쩍이는 유리 집으로 바뀌었고, 풀이 무성하던 물가엔 하얗고 깔끔한 빌라들이 자리 잡았다. 너무 깨끗하고 세련되어서 귀족의 성채같이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집이 많아졌어도 여전히 사람 왕래가 없어 잠자는 도시인 듯 고요했다.

해안가의 호텔에 묵었기에 창 밖은 온통 에메랄드 빛 바다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방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호텔을 나와 전에 살던 아파트 옆 바다를 향해 걸었다. 예전에 매일 찾아가던 곳, 갈매기들만 쉬고 있던 나의 바닷가였다. 강남 한복판에서 자동차의 홍수와 오가는 사람들에 부대끼며 살고 있는 내겐 거리가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해 좀 겁이 나기도 했지만, 추억이 서려있는 곳을 찾아가는 건 다리 아픈 것도 겁도 다 잊게 만들었다.

드디어 옛 아파트 옆 바닷가에 다다랐다. 넓고 긴 모래밭에 종일 혼자 앉아 수만 가지 생각을 파도 너머로 실려 보내던 그 망망한 바다를 대하려니 마음이 설레었다. 그동안 얼마나 와보고 싶었던 곳인가. 나이 들며 체력이 달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겼었는데, 꿈의 그 바다엘 온 것이었다.

나의 바다를 보았다. 그런데, 바다는 기억 속의 그 바다가 아니었다. 전엔 아득하게 끝없이 끝없이 넓었는데, 그다지 크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일곱 여덟 살 땐 조그만 학교 운동장도 바다처럼 커 보이는 법이지만, 오십이 넘어 보았던 망망한 바다가 몇 년 사이에 작게 보이다니….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건 내 마음이 달라져서라는 걸. 예전에 바다 앞에 앉아 있던 때, 당시 무척 애착을 느끼며 정열을 쏟았던 세계를 놓아버린 상실감과 허전함이 망망한 바다처럼 무한히 컸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걸. ‘그만큼이나 공허 했었구나….’ 나는 지난날의 나를 연민의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면 바다가 작아진 건 내 마음이 이제 무언가로 채워졌다는 걸까, ‘지나고 보면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시간이 주는 가르침 때문인가.     

바닷가의 모래밭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변에 줄을 지어 서있는 야자수에 여인네 젖가슴같이 커다란 야자열매들이 포도송이처럼 가득 매달려, 열매가 떨어지면 다친다며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 팻말이 있었다. 야자나무 아래엔 젊고 건장한 인부 몇이 사다리를 놓고 ‘사무라이’가 썼음직한 긴 칼로 열매가 달린 야자수 잎을 탁 탁 치며 자르는 중이었다. 코코넛 물이 들어찬 열매를 인부가 아무렇게나 막 던졌다. 노르스름한 코코넛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며 공처럼 떼구르르 굴렀다. 그래도 깨어지지 않았다.

일하던 인부 한사람이 목이 마른지 열매의 윗부분을 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시작했다’는 표현이 꼭 맞는 게, 그가 물이 나오도록 코코넛을 자르는 건 겨울에 장작을 패는 일만큼 힘들어 보였다. 젊은 그가 사무라이 칼로 열 번 스무 번 내리쳤다. 하지만 야자열매 껍질은 약 올리듯 새하얀 속살을 조금씩 보일뿐 끄떡도 안했다. 그는 코코넛 물을 꼭 마시고야 말겠다는 욕망에서인지, 가까이에서 동양여자가 자기의 움직임을 보고 있어선지 포기하지 않았다. 몇 십 번을 쳐서 아마도 그가 기운이 다 빠졌을 즈음 속살 속에서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젊은이는 고개를 젖히고 열매속의 물을 꿀꺽꿀꺽 소리 나게 마셨다. 나도 그 물을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에게 다가가 하나 사겠다고 말할까, 한참 망설였지만 결국은 아무 말 못하고 구경만 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야자수 뒤로 펼쳐진 잔잔한 바다와 여기저기 가득 쌓여 뒹구는 코코넛, 열매를 잘라 마셔가며 한가하게 일하는 인부들…. 한데 어우러진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웠다. 고요했다. 전엔 밀려왔다 쓸려가곤 하던 파도를 들여다보며 병이 나도록 덧없음에 젖었는데, 같은 바닷가에서 이번엔 한없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 간간이 이슬비가 내렸지만 평온함에 젖은 나에게 그건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내 마음의 상태 때문에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는 게 아닐까.

며칠 동안 바다를 보다 돌아왔다. 일상으로 복귀해, 오자마자 우리 동네 백화점의 수퍼엘 갔다. 장을 보러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던 생활의 터전이었는데, 수퍼의 통로를 가득 메우며 부딪치는 사람들의 번잡함과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큰소리로 통화하는가하면 동행끼리 얘기하느라 목청껏 떠드는 그 많은 소리들이 뒤죽박죽 엉키어 귀청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전에도 이랬던가? 나는 마치 이방지대에 온 것처럼 낯설어했다. 내 마음이, 고요하고 한적한 호주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곧 내가 속한 세계로 돌아왔다. 다시금 번잡함에, 소란스러움에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함을 넘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감지한다. 나도 번잡함의 일원이 되어 이리저리 부대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한다. 호주 바닷가에서 맛보았던 평화는 갖지 못한 코코넛처럼 남의 것일 뿐이었고, 나는 우리 동네의 소란함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안도와 평온을 느낀다.

호주 바닷가의 정경은 문득 꿈을 꾼 듯, 이제 기억의 저 아득한 곳으로 숨어 버렸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