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심萬古心

 

 

                                                                                    박주병

다리 힘이 없기는 하지만, 집 안에만 죽치고 있자니 너무 답답하고 외로워 오늘은 팔공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금호강에 나왔다. 참 오랜 만이다. 재작년 봄에 나와 보고 처음이다. 드나나나 거치적거리는 몸이 되었는데 강이라고 날 반가워할까만 지팡이를 끌며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하고 서 있기가 힘에 부치면 쪼그리고 앉기도 한다.

강줄기를 바라보니 조각배 대여섯 척이 조는 듯 한가롭고 물새들만 종작없이 설친다. 날갯죽지에 힘이 빠진 놈이야 새에도 있겠지…….

이 강에 나오니 옛날 생각이 난다. 1966년, 내가 처음으로 취직을 해서 살림이랍시고 단칸 셋방에 막 둥지를 틀었을 무렵에 내가 좋아하는 한 어른이 대구로 나를 찾아왔다.

그분이 먼저 한데로 나가 보자고 했다. 콧구멍 같은 남의 신접살이 신혼 부부의 방에서 옷도 안 벗고 하룻밤을 새우고 나니 좀 답답했던 모양일까. 같이 이 강에 나왔다. 수사강洙泗江 강변을 거닐며 공자님 생각을 해 보기도 하고 석가며 예수의 유적을 찾아 인도며 유럽 등지로 가보았으면 참 좋겠다고 그분은 꿈같은 말을 했다. 외국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지만 외국여행이 지금만큼은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두 번 건너뛴 띠 동갑이지만 그분을 대하면 나는 늘 한동갑 같았다. 농촌에서 양복 입은 오십대 육십대를 만나기란 오늘날 한복 입은 이십대를 만나기보다 더 어려웠던 그 시절에 그분은 늘 양복을 입고 모자는 쓰지 않았다. 턱이 파랗게 수염을 깎고 향수 냄새를 풍기며 바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강호를 주름잡았다. 사람들은 축지법을 쓰는 모양이라고 숙덕거렸다. 사자 같은 얼굴은 늘 미소를 잃지 않았고 괄괄하고 시원시원했다. 가끔 유성기를 틀어 놓고 이상한 소리를 곧잘 따라 했다. 근엄하고 과묵하며, 갓을 쓴 수염이 긴 나의 아버지의 조용한 자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제 말엽에 징용을 피하려고 아버지와 더불어, 무슨 비결에 피난지로 나와 있다는 우복동牛腹洞인가 하는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앞산이 턱을 괴는 어느 산골로 이사를 해서는 한동안 한 집에 살았고, 양식을 늘이려고 더불어 산나물을 뜯기도 했다. 안팎이 한 식구처럼 지내며 늘 우리 집 발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우리 집 ‘거리 삽짝’이라고 했지만 그분은 그런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일제는 패망했지만 남북이 갈라지고 세상이 온통 뒤숭숭할 무렵 그분은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밝던 얼굴에 늘 수심이 가득했다. 십리허에 살면서 밤으로만 우리 집에 오시곤 했다. 이때 아버지의 권유로 그분은 계룡산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도사를 찾아갔다. 한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했는데 세상이 안정되자 어느 날 그분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전처럼 웃음을 되찾게 되었지만 사람이 좀 이상해졌다. 툭하면 입에서 한문 문자가 술술 나왔다. 온 방안에 글씨를 써 붙여 놓고 소리 내어 무슨 글을 읽기도 하고 눈을 감고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아버지도 그 어른도 다 세상을 떠난 지가 오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태어나 일생을 전란에 시달리며 우환의 세상을 살았던 불우했던 그분들. 첩첩산중에서 같이 산나물을 뜯으며 때를 기다리던 그 시절이 이제 와서 내가 뭘 좀 알게 됐는지 사무치게 그립다.

한 줄기 강바람이 휘익 몰려온다. 아직은 초봄이라 바람 끝이 차갑다. 옛날 대학시절, 추위를 이기려고 서리 쌓인 방에서 계집애들처럼 친구와 꼭 껴안아 보기도 하며 킬킬거리던 그 밤은 그래도 이내 가슴이 따스했는데, 지금은 이불 같은 외투 속에서도 나는 왜 이리도 한기를 느낄까. 야망, 열정, 그리움, 사랑, 질투, 이별, 미련 같은 것이 다 스러져 버려서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이 강에서 그분이 내게 하던 말이 생각난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지 않다” “큰 내를 건널 수가 없다” “큰 내를 건너라” 이 네 가지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를 깨우쳐 주려는 걸로 들렸지만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큰 내’를 앞에 두게 되었을 때마다 늘 그분이 떠올랐다. 부끄러운 일도 잘못한 일도 헌데처럼 남겼지만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입속으로 그분의 이름을 뇌어 본다. “이남호 목사, 이남호 목사…….” 내 앞에선 성경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공자가 뭐라고 말했다느니 맹자가 또 무슨 소릴 했다느니 하는가 하면 내 귀에 ‘모따나 모따나’라고 들리는 걸 보면 틀림없이 무슨 염불 같은 것도 외우셨지 싶다. 스스로는 늘 목사가 아니라 ‘잡사’라 했다.   

“잡사, 잡사,……” 그때는 킬킬 웃음이 나오던 이 말을 이제 와서 입속으로 가만히 뇌어 보면 나는 더 외롭고 슬퍼진다.

   

젊어 청춘 좋은 그때 엊그젠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늙었구나. ……안으로 들어오면 아내조차 상관없고 …… 세월아 있거라, 팔도 호걸이 다 늙는구나. …… 어화 저 세상아, 허망한 일이 여기 있지…….

  

유성기를 틀어 놓고 그분이 따라 하던 이 소리, 판소리 명창 이동백이 부른 <단가 백발가>를 오늘은 내가 흉내내어 본다.

1950년, 향년 여든다섯에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때 이남호 목사는 마흔한 살이었으니 크게 보면 두 사람은 한 시대 사람이다. 두 사람 다 오래 살긴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슬하에 일점혈육도 없다. 내외분이 모두 풍장을 한 이남호는 남은 흔적이라곤 아무 것도 없지만 이동백은 소리가 남았다. 소리는 남는가.  

이동백의 나이 진갑을 넘긴 이듬해(1928)에 했다는 녹음이 웬일로 영락없이 병든 노인 숨넘어가는 소리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힘겹게 꺾어지는, 마디마디 서러운 이동백 노야의 백발가를 들으면 듣고 또 들어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난다. 한 줄기 바람으로 사라져간 이남호 그분 생각에 더 그렇다.

멀리 팔공산이 어둑하고 금호강에 황혼이 깔린다. 조각배는 그예 강기슭으로 다 돌아가 고즈넉이 매여 있고 물새들도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다. 어화, 저 물새야! 사공의 애내성杳乃聲을 네가 들었더냐? 망령되이, 사람의 만고심萬古心을 새한테 묻는구나!

밤차로 강보에 싸인 내 손자 고 놈이 온댔다. 어서 돌아가야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며 지팡이를 휘휘 내두른다.

 

 

고려대 법대 법학과 졸업.

철학박사.

수필집 : 《까치밥》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