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좋아

 

                                                                               구 활

청령포 나루터 주막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창가에 홀로 앉아 별 안주 없는 소주를 한 시간만 마시기로 했다. 내려다보이는 강물 위론 어른어른 달빛이 비쳐 물속에 잠겨있는 혼령들이 물비늘을 털고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서늘한 밤이었다.

오늘 밤의 화두는 궁녀 덕중이다. 이곳 청령포는 단종이 귀양 와서 살았던 곳이니 만큼 화두의 주체도 단종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굳이 덕중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단종과 덕중은 둘 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단종은 세조의 조카지만 덕중은 세조의 아들을 낳은 궁녀, 즉 왕의 여자다. 그리고 단종의 이야기는 역사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덕중의 사연은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이를 알리기 위함이다.

정한 시간 동안에 단 한 사람만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스님들이 안거 기간 동안 화두 하나를 들고 선禪에 들지만 용맹정진하지 못하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귀 떼와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도 전력 집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 속에는 무의식이 잠재해 있고 무의식 속에도 의식의 흐름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주막의 창밖으로 보이는 청령포 남쪽 능선은 어둠에 묻혀 희끗하고 간간히 빗금을 그으면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참선에 든 의식을 곧잘 흩트려 놓는다. 생각이 빗나갈 때마다 각성제로 털어 넣는 소주는 혼란을 다스리는 죽비소리가 되기도 하고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맑은 술기운은 목구멍 군데군데 가로등을 밝혀 대낮 같이 환하다.

조선의 왕들이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살해하고, 데리고 살던 처첩을 참수한 예는 아주 흔하다.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으며 태종은 왕권을 잡기 위해 형제와 신하들을 때려 죽였다. 어진 임금으로 알려져 있는 세종도 왕의 여자인 궁녀 내은이가 내시 손생을 사랑하게 되자 두 연인들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세조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의 반대세력을 죽이는 데는 도가 터진 사람이다. 그는 질투와 분노의 화신이다. 역사는 원래 승자의 편이어서 세조도 때로는 인간미가 있는 것처럼 미화하고 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덕중은 수양대군인 시절의 세조를 잠저에서 가까이 모셨던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다. 세조가 왕권을 찬탈하여 보위에 오르자 덕중도 일약 정3품인 후궁의 신분으로 급상승한다. 그러나 왕이 된 세조는 대궐에 들어 온 후로 궁녀들의 꽃밭에서 꽃 꺾기 재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덕중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신분 상승에 따른 권세와 호사도 덕중의 외로움을 갚아 주지는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원래 끼 많은 여인은 끓어오르는 피의 기운을 억제하지 못하는 불나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덕중이 그랬다. 왕의 여자는 누가 건드려도 안 되고 스스로 ‘건드려 달라’고 애원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둘 다 죽음을 면치 못한다.

독수공방에서 맞는 밤은 외롭고 쓸쓸했다. 덕중은 마음 속에 점찍어 둔 세조의 동생인 이구의 아들 이준李浚에게 한 통의 연애편지를 보낸다. 왕의 여자인 덕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죄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몸 속 은밀한 곳에서 수군거리는 피와 끼의 수다를 이겨내지 못한다.

“봄비가 내려 궁중 연못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홀로 연꽃을 보는 방자의 심사는 몹시 곤고합니다. 군께서 잠저에 오실 때 관옥 같은 얼굴을 훔쳐보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키워 왔습니다. 심처에 있는 처지라 구구한 마음 전할 길 없으나 죽어도 사모하는 마음 달랠 길이 없습니다.”

언문으로 씌어진 덕중의 서간을 받은 이준은 아버지에게 고했고 아비인 이구는 이 사실을 형인 세조에게 무릎 꿇고 아뢰었다. 연서사건의 시말을 보고 받은 세조는 한참 동안 버려두었던 덕중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고 묘한 페이소스에 휩싸였다. “내가 너무 했구나, 그래도 그렇지.” 세조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친히 국문할 것이다. 모두 잡아들이라.” 세조의 엄명이 떨어지자 연서를 전달한 내관 최호와 김주호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곤장을 맞는 박살 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 일에 연관이 있는 궁녀 둘도 볼기짝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 사육신을 능지처참 형에 처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척살하고 살생부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세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인의 배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세조는 젊은 한 때 자신과 사랑을 나눈 덕중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지난 번 환관 송중에게도 연서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의 행실을 들추며 끝까지 엄형을 주장했다. 세조도 할 수 없이 사랑했던 여인 덕중을 도성 밖에서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목에 올가미를 거는 순간 덕중은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세조였을까, 아니면 이준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체국에서 연애편지를 썼던 유치환 시인처럼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라고 했을까. 정말 그랬을까. 나중 저승에 가면 세조가 오줌 누러 간 사이 덕중에게 살짜기 물어 볼 작정이다. 덕중은 정말 조선 최고의 멋쟁이다. 그런 멋쟁이와 사랑하다 죽어도 좋을 연애 한 번 하고 싶다.

 

 

《현대문학》으로 등단(‘84년),   《매일신문》 문화부장·논설위원 역임.

에세이집 《그리운 날의 추억제》,  《아름다운 사람들》 외 다수 출간.

현대수필문학상· 대구문학상· 원종린문학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