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풍경 3題

 

 

                                                                                    정태헌

 

해뜰참

산자락 밑 산책로, 얼마쯤 걷다가 쉼터에 이르니 앳된 남녀가 마주앉아 말을 주고받고 있다. 휴일 이른 아침이니 게으름을 부리며 늦잠도 자련만 젊은이들치고 부지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어깨너머엔 들장미 예닐곱 송이가 길섶에 피어 있다. 여자 목소리의 톤이 살짝 들려 있다.

“그니까 꼭 낚시를 가겠다는 거야?”

“따라가자니까, 친구 와이프들도 온대.”

“그럼, 저수지에서 결혼기념식을 하자구?”

“내년엔 멋진 곳으로 갈 테니까 이번만 양보해라.”

“누구랑 결혼했어, 친구들이야 나야?”

“이번 빠지면 바가지로 욕먹어.”

“흥, 친구들한테 욕먹으면 안 되고 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네?”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벌써 식었나 봐.”

“뭐가?”

“몰라, 얼마나 기다렸는데……”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발밑에 있는 돌멩이만 발로 툭툭 찬다. 산기슭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일어나더니 여자의 어깨를 툭 치며 한 마디 뱉는다.

“딱, 이번만 양보야!”

여자는 금세 얼굴이 환해지더니 일어나 남자의 팔을 잡고 팔짝팔짝 뛴다. 아마 간밤부터 시작된 실랑이가 아침까지 계속되다가 이 쉼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등 뒤엔 아침 햇살을 받은 들장미가 붉디붉다.

  

한낮

학교 운동장 가. 왕벚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햇볕만큼이나 쨍쨍한 웃음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자전거를 가지고 온 중년의 부부 한 쌍, 쉬는 날이지만 운동장엔 두 사람뿐이다. 벚나무 가지가지엔 구름 같은 허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여인은 자전거 위에 앉아서 페달을 밟고 있고 사내는 뒤에서 짐받이를 붙잡고 따른다. 여인이 자전거 연습을 하는데 사내가 돕는 모양이다. 한데 여인은 몇 번 페달을 밟다가 사내가 손을 놓으면 자전거와 함께 옆으로 힘없이 넘어지고 만다.

“…… 밟아도 자꾸 넘어지네.”

“그러니까 중심을 잡고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지!”

사내는 아쉽다는 듯, 넘어진 여인을 부축하여 몇 번이고 일으켜 세운다. 넘어졌어도 깔깔대며 일서서는 여인의 발걸음이 이상하다. 절뚝거린다. 걸음걸이로 보아 어제오늘 다친 것 같지는 않다. 장애인인 모양이다. 이제야 자전거를 배울 생각이 났던 것일까. 두 사람은 벚꽃 아래에서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며 자전거 연습을 거듭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곁에서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꽃그늘 주변이 더욱 환하다. 여인의 가슴속에도 꽃이 환하게 피어 있을 터이다. 나도 여인처럼 페달을 밟듯 발걸음을 뗀다. 연분홍 꽃잎 한 장 날아와 나풀나풀 길잡이를 한다.  

 

해물녘

구례 산동 산수유 마을 어느 집 앞. 노란 산수유 꽃이 담 너머에서 일렁인다. 낮은 돌각담으로 둘러싸인 집엔 대문일랑은 아예 없다. 발돋움하지 않아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발걸음을 낮춰 돌각담 곁으로 다가간다. 늙은 양주만 사는 단출한 집인 모양이다. 안주인은 마당 멍석에 널어놓은 산채를 거두어들이고 있고, 바깥주인은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눈길을 두고 있다. 뒷산 솔수펑에서 아까부터 꾸어~엉 꾸~엉 꾸~엉, 장끼가 연방 우꾼하게 목청을 돋운다.

“잘 몰랐는감?”

“……저 잣 것은 모가지도 안 아플 꺼나.”

동문서답,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안주인은 노란 꽃그늘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응얼응얼 혼잣말하며 계속 손을 놀리고 있다. 바깥주인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눈을 들어 먼 산을 응시한다. 해넘이를 보고 있는 걸까. 돌아서서 담벼락에 등을 대본다. 돌각담이 등줄기에 대고 무언의 말들을 쏟아낸다. 숱한 신화들이 가슴께로 여울처럼 흘러든다. 바람 한 자락 스쳐 담 모롱이로 사라진다. 산그늘이 어느새 발목을 적시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