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수필가의 八十 회고록④|

 

마음을 따라 디딘 오솔길

 

 

                                                                                    김시헌

8·15 해방이 되자 할 일이 없어졌다. 일본 사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으니 내가 다니던 직장이 없어지고, 이차대전이 종전되었으니 징병에서도 풀려났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졌다.

그러나 나이는 21의 청년이 되었다. 고향 농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까웠다. 아깝다기보다 초조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읽으시던 한문책 더미를 뒤적거리다가 중용中庸이란 책을 발견했다. 첫 대문에 ‘중자불편불의무과불급中者不偏不倚無過不及’라고 했기에 짧은 한문 실력으로 더듬어 보니까 너무 명쾌한 지적이었다. ‘중간이란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하는 뜻이 아닌가.

이튿날 아침, 아버지 앞에 책을 내놓고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게 어떤 책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고 꾸중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유를 댔다. “취직이 되면 고향을 떠나야 하니까 순서를 다 밟을 수 없다.”고……. 그 말에 이해가 가시는 모양인지 첫 줄부터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당시 요즘 말하는 사법 서사 일을 보시고 한시漢詩를 지으셨다. 한지韓紙조각에 시를 쓰셔서 느릿하게 소리 내어 읊으셨다. 며칠 동안 읽으니까 ‘유정유일 윤집궐중唯精唯一 允執厥中’같은 말이 나왔다. 나는 그런 말들의 뜻이 좋았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대목에 힘을 넣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중용은 곧 철학이란 말씀도 하셨다.

고향 마을에서 안동시까지는 30 리가 된다. 어느 날 걸어서 안동시에 갔다. 현대의 책이 읽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어 책은 다 들어가고 한글판 책이 서점마다 가득 나와 있었다. 어느 곳에 숨었다가 해방이 되자 나타난 책들이었다.

안호상의 《철학개론》, 한치진의 《철학개론》을 샀다. 철학개론을 산 이유는 <중용>과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한글판 문법과 일본어로 된 《문장작법》도 샀다.

두 달이 못되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떠난다 해도 <중용>은 독학으로라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실행을 못하고 있다.

중등학교 교원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취미과목을 결정해야 되었다. 역사, 공민, 국어를 생각하다가 국어과로 낙착이 되었다. 이유는 장차 노인이 되면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20대에 노인시절을 미리 생각한 나는 너무 노인스러운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30대로 접어들 때 대구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문화면의 수필에 관심이 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면 전부에 수필 한 편씩 싣고 있었다. 읽으면 재미가 있고, 문득문득 나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30이 되면 청춘을 잃는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때의 심경을 거의 그대로 써서 영남일보에 보냈다. 일주일 후에 나의 글이 큰 제목을 달고 문화면 전면에 나왔다. 나는 감동했다. 내 글이 활자화 된 사실이 기뻤다. 그런데 내가 써 보낸 제목이 아니고 ‘하강좌표30대下降座標三十代’라 쓰여 있었다. 그때의 신문사는 한자어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 뒤,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현대문학》, 《世代》, 《政經硏究》 등 월간 잡지에 글을 보내 보았다. 3~4개월 후에 반드시 발표가 되었다. 비로소 나는 용기를 얻었다. 글을 쓰면서 인생을 즐기리라 마음먹었다.

6·25사변을 겪고 정신면에 큰 변화가 왔다.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잃게 한다는 생각과 당시 유행처럼 나온 실존주의 계통의 책 때문이었다. 《이방인》이란 책을 읽고 너무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게 이방인과 같은 요소가 있었던 모양이다. 니체, 키에르 케고르, 사르트르 같은 사람이 쓴 철학책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냥 그런 책이 좋았다. 결과로 나는 고독과 허무에 젖어갔다. 인생을 밝게 보기보다 어둡게 보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책은 한갓 지식으로 읽을 뿐, 너무 성격화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후회이다.

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종교밖에 없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스님을 만나면 곳을 가리지 않고 접근해서 질문을 했다. 그들은 불교에 대해서 모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성당에도 가보고 교회에도 가 보았다. 어느 종교를 믿을 것인가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믿어야 되겠다는 이지理知와 실제로 믿어지는 감정은 일치하지 않았다. 감정이 움직여주지 않으니 어찌하랴?

60이 되었을 때, 나는 종교와 예술과 수필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잡동사니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모두 겉핥기로 넘기고 지금은 껍데기만 남았다는 생각이다.

 

인생 80, 거리에 나가 서 있으면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땅에 붙어서 걷고,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면서 몸이 기우뚱거린다. 그 어린 아이와 노인 사이를 지나서 현재에 와 있는 내가 아닌가!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것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

우주는 원 아니면 공이다 둥글둥글 영원히 돌고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의 구별조차 희미하다. 사는 대로 살고, 건강하게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현재의 나의 전부가 되었다. 나옹선사가 썼다는 시를 가끔 기억해 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