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론|

 

뿌리의 온기

 

 

                                                                                         김형진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생명을 지배한다. 땅 속에 몸을 숨긴 채 흡수작용, 호흡작용, 저장작용, 지지支持작용을 통해 생장을 주관한다.

뿌리에 생명을 부여하여 그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온기이다. 사막의 땡볕 아래에서나 툰드라의 얼음 위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 속으로 숨은 것이다.

이러한 섭리는 식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동물에도 뿌리가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랜 동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뿌리의 영향에 매어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력일 수도 있고, 가계家系일 수도 있고, 인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

 

 

‘사람 사는 집-배정인’의 뿌리는 어머니다.

절골 고개 아래 있는 집. 어머니는 들일을 나가는 날이면 항상 당신이 아끼는 까만 물동이에 샘물을 길어다 그늘진 곳에 놓았다. 물동이에 대발을 덮어 놓고 대발 위에는 바가지까지 엎어 놓았다. 그러고 사립문은 반쯤 열어 놓았다. 길손을 위한 배려였다.

어린 화자는 어머니의 그러한 애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길손에게 물 한 바가지가 무슨 대수며, 행인의 목마름이 어디 어머니 책임인가. 한 해 두 해도 아닌 긴 세월을 한결같은 데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나는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그 까닭을 어머니에 여쭤보았다. (중략)

“이 집이 누구 집이냐?” 이 뜻밖의 반문에 한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나는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두……그야 우리 집이지…….”

“헛 나 먹었지. 대학을 읽으면 뭘 해.” 혀를 끌끌 찼다. 선문답 같았다. 나는 어리둥절할밖에 없었다.

“빈집에 대문이 닫혀 있으면 사람이 어찌 들어올 수 있겠냐? 개짐승이면 몰라도. 이 근방에는 우물도 없고 인가도 한참을 가야 있는데 산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면 어쩌겠냐? 명색이 집이라고 하나 있는 게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면, 그게 어찌 사람 사는 집이겠느냐?”

도시의 벽돌집에 살면서 나는 왠지 가슴이 허허하여 까닭 모를 조갈증에 시달린다. 오늘도 발부리만 내려다보며 높은 벽돌담 아래 그늘로만 붙어 걸었다. 자꾸만 가슴을 걸어 잠그는 저 고대한 집들을 보면서, 어머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슴슴히 울궈보고는 한다. 옛 성인의 말씀처럼.’

 

문제는 도시의 벽돌집에 살면서 조갈증에 시달리는 화자와 자꾸만 가슴을 걸어 잠그는 고대한 집들에 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어머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온기이다. 발부리만 내려다보며 높은 벽돌담 아래 그늘로만 붙어 걷다가 찾아낸 것이 오랜 동안 잊고 지내던 어머니다. 이는 뿌리의 온기로 허허로운 가슴을 채워 조갈증을 풀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차갑고 삭막한 세상에 온기를 베풀어 따뜻함을 나누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부전여전 모전여전-강영선’의 뿌리는 아버지이다.

아버지, 나, 딸 삼대. 딸은 신입생 환영회에 가고 나는 재래시장에 들러 생선가게 앞을 지나다가 재첩에 마음이 끌린다.

재첩이 떠올린 먼 기억 속에서 화자는 아버지를 만난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약주를 들고 오신 다음날 아침이면, 집 앞을 지나는 재첩 국 행상 아지매의 외침을 따라 잡아 냄비에 그 국물을 받아 오셨다. 거기에 정성을 담아 해장국을 끓여 드리면 아버지는 뜨거운 해장국을 시원하다시며 드셨다. 그 때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나도 가끔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마실 때가 있다. 그런 이튿날 새벽이면 영락없이 위통을 앓는다. 그럴 때 남편이 끓여 주는 해장국이 시원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한 딸은 의외로 씩씩한 모습이다. 왜 이리 늦었냐고 다그치자,

 

‘같은 과 남학생 한 명이 술에 취해서 그 친구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입생들은 다 비슷하게 마셨는데 왜 자기만 멀쩡한지 묻는다. 은근히 웃음이 났다. 엄마 딸이니까 그런 거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친정아버지가 오늘 일을 보셨다면 부전여전, 모전여전이라 했을까?’

 

삼대에 걸친 술꾼 이야기가 별로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나 작가가 이 글에 담고 싶은 것은 술꾼 이야기가 아니다. 따뜻한 가족애다. 이 따뜻한 가족애의 뿌리를 술꾼 아버지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내일 아침이면 재래시장에서 사온 재첩으로 딸을 위해 해장국을 끓일 수밖에 없다. 딸도 언젠가는 가족을 위해 시원한 해장국을 끓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기 가계의 뿌리를 통해 현대인에게 핵가족화로 인하여 잊어버린 가족애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복伏들이 산간의 하루 그리기-김진식’의 뿌리는 자연이다.

화자는 은퇴 후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산간에 터를 잡았다. 터에는 채전도 갈고 정원도 꾸몄지만 아직은 주말에 와 컨테이너에 의지해 지낸다. 그날은 태풍 ‘갈매기’ 한 바탕 기세를 떨치더니 햇빛이 났다. 산간의 모든 생물들-풀과 나무와 곤충과 새-이 활기에 넘친다. 이러한 자연의 활기가 화자의 마음에 밀착해 온다.

수나무뿐이어서 일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은행나무와 가래나무가 안타깝다. 암수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니까. 정원의 귀빈인 노각나무, 언덕을 지키고 있는 노간주나무, 산수유, 청매, 홍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무궁화, 주목, 단풍나무, 오갈피나무, 앵두나무, 철쭉, 골단초, 사철나무, 장수 격으로 언덕에 서 있는 오동나무, 수세를 자랑하는 벚나무, 남쪽 산자락 가운데엔 산뽕나무가 정자나무 노릇을 하는 정원. 그 정원에는 물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새가 날아든다. 어디에도 인위는 없다.

 

‘나는 지금 산뽕나무 아래서 바람결에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흰 구름 저편에서 찾아오는 계절과 세월의 몸짓을 찾으며 삶을 깨쳐보려 한다. 무심한 구름이 흐르고 다시 먹구름이 천둥번개를 거느리고 비를 몰고 온다.

복더위도 ‘갈매기’의 위력을 어쩌지 못하고 비켜서 있다. 자연의 조화다. 그것을 보기 위하여 눈 밖의 눈을 밝히고, 그것을 듣기 위하여 귀 밖의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깨닫기 위하여 멍청하게 대자연에 든다. 여름 산간의 무위無爲, 그 하루가 저문다.’

 

작가는 자연을 즐기기 위해 자연 속에 터를 잡은 것이 아니다. 비정한 현대문명이 빚어낸 각박한 현실에 부대껴 살면서 때때로 찾아드는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산간을 찾은 것이다. 산간에서 자연의 조화를 보기 위해 마음의 눈을 밝히고 자연의 조화를 듣기 위해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지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삶의 뿌리를 찾으려는 각성이며, 비정한 현대문명에 온기를 전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 있다-김종희’의 뿌리는 인간의 역사이다.

고인돌과 돌탑과 그리고 어머니. 야산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들은 죽음이 주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말해주고, 산길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쌓여 있던 돌무덤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이 모여 아름다운 탑으로 서 있다. 영원성을 획득한 것이다.

 

‘기억에서 기억으로 흐르는 영원성, 그 결과 폐허로 보였던 돌의 군락지는 역사로 환원된다. 나아가 그 속에 끝없는 심미적 만남을 추구할 때 돌은 비로소 탑으로 승화된다. 숱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긴 세월에 이어져 탑신에는 이끼도 앉는다. 이끼, 그것은 돌탑의 진물이다. 진물이란 외무의 어떤 것이 육화된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으로 이끼는 돌탑의 언어이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이끼가 앉았다. 사람들은 이끼 같은 검버섯을 저승꽃이라 부른다. 저승꽃이라 부를 때 검버섯은 삶의 외곽으로 밀려난 느낌을 준다. 저승꽃이란 말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정경들이 사라진 우울한 냄새가 배어 있다. 그것은 자꾸 허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저승꽃을 돌탑에 앉은 이끼 같은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본다.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퇴적 위에 움트는 생동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역사란 존재 그 자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상상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리고 또 끊임없이 추구하는 용력이 있다. 그래서 미지의 것을 탐구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두려웠던 것, 우울한 냄새가 배어 있는 것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킨다. 고인돌이 그러하고, 돌탑이 그러하고, 어머니의 얼굴에 핀 저승꽃이 그러하다.   

여기서 야산에 흩어져 있던 돌들, 두려움마저 주던 돌무덤, 어머니는 역사의 뿌리이다. 이 뿌리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시키는 힘이 가졌다. 그 힘은 온기에서 나온다.

 

역사란 이어 내려옴이다. 문학이 추구하는  뿌리는 단순한 역사탐색일 수 없다.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 나름의 객관적인 인식과 주관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사실事實 그대로 쓰는 것이 오히려 사실성寫實性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죽만을 얄팍하게 그려낸, 그래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글은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 기술記述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수필가의 어려움이 있다.

어쨌든 많은 수필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뿌리의 온기를 깨내려는 애씀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