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 속으로

 

 

                                                                                        김수봉

가끔은 일상을 털어버리고 집을 떠나 여행이나 레저를 즐기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경기景氣가 어떻고 아무리 물가가 치솟는다 해도 끄떡없이 놀건 다 놀고 갈 곳은 다 가며 자기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은 것 같다.

여행의 이로움을 예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떠나고 싶은가보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의 삶, 직장과 집을 오가는 단조롭고 무료한 쳇바퀴의 날들, 사소한 것에서부터 밥줄을 위협받는 일까지 나를 옭아매는 스트레스의 연속, 아! 그래서 떨치고 떠나고 싶은 거다.

어쩌다 기회가 주어져 떠나게 된다면 설렘을 앞세우고 기대는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다시는 지긋지긋한 그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아주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행려자나 노숙자로 되어버린 일은 거의 없다.

여행과 레저가 즐겁고 자유로운 것은 돌아갈 집과 일상이 있어서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세계의 접촉, 그러나 이것은 잠시의 신선함일 뿐이다. 가령 도시생활에 젖어 살아온 어떤 이가 모처럼 농촌을 찾아가면 전원스러운 풍경만을 눈에 담고 감탄한다. ‘아!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러나 날마다 고역의 농사일을 치러야 하는 농부의 현실에선 전원이 아니다. 생산의 현장일 뿐이다. 농부는 속으로 말하리라. ‘한번 살아보라지. 얼마 못가 집에 돌아가고 싶을 테니까.’ 하고.

그래서 집 떠나 있는 날이 많아질수록 돌아가고 싶은 조바심도 커진다. 단조롭고 무료한 일상의 날들이 드디어 새로운 가치로 느껴지는 거다. 레저와 여행은 더 나은 일상을 위한 재충전, 바로 그것이니까.

 

옛 우리 할머니, 어머니 들은 어쩌다 먼 친척네집 대소사에 나들이를 갔다가 이삼일씩 묵고 오는 때가 있다. 흙먼지 풀썩거리는 신작로를 한나절씩 걸어서 온다.

집에 들어오면 먼저 마루에 걸터앉아 ‘휴ㅡ’ 하고 숨부터 돌리고는 버선을 벗어서 마루 끝에 탁탁 턴다. 버선등에 앉은 먼지를 털고 나들이의 피곤도 함께 털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하던 말, ‘어이쿠! 우리 집이 젤이제, 집 나가면 고생이여.’ 였다. 그것이 눈보라치는 엄동이라면 방에 들자마자 언  손발부터 아랫목에 묻으면서 똑같은 말을 했다.

‘내 집’은 곧 따뜻한 아랫목이며, 훌훌 옷을 벗어도 되고 맘 편히 잠잘 수 있는 공간이다. 한식구의 눈길이 있으며, 밥상을 함께하고 웃음이 피어나는 곳이다. 예절과 격식과 체면을 덜 챙겨도 되고 말썽부리는 손자나 아들의 볼기를 철썩 때려도 되는 곳이 우리 집이다.

‘우리 집이 젤이제….’ 이 말은 집이 있으니까 여행도 휴가도 즐거운 것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밖’에서 맘껏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안’이라는 확실히 안존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행려자나 노숙자가 가고 싶어도 갈 집이 없는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가정이 없는 사람은 정박할 항구가 없는 배와 같다.’는 말이 있다. 호화로운 호텔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평생을 살아간다면 행복하리라는 건 착각이다. 오두막이라도 우리 집, 내 가정이 최상이다. 거기에는 아옹다옹은 있어도 기다림이 있고, 가난이 있어도 반목은 없다. 그래서 일상의 삶이 반복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상의 사소한, 바로 눈앞에 있는 것, 헌옷이 걸려있고 신던 신발이 현관에 흩어지고 고쳐야 할 우산이 있는 공간이 진짜 삶이 피어나는 곳이다.

바깥세상에서 소외당해본 사람만이 내 집, 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를 안다.

가끔 먹어본 외식이 별미일 수는 있어도 마냥 먹고 살 수는 없다. 일상으로 먹어도 물리지 않는 ‘집밥’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갖가지 건강식품과 보약이 아무리 몸에 좋다 한들 그것만 먹고 살 수가 없다. 어떤 보약 어떤 건강식품도 결국은 일상의 밥을 잘 먹기 위한 보조일 뿐이다.

밥이 최고의 보약이듯이 일상의 삶이 상선上善의 삶이다. 그래서 모든 도道의 수행은 길을 걸어가듯 일상을 살아가는, 곧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