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냅숏*

 

이난호

 

이국의 나른한 중세도시**, 쨍한 오후 햇살이 정수리에 직사했다. 안내인을 따라 박물관 내정을 건너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지하 층계 앞에서 내국 안내인의 서툰 영어 해설이 이어졌다. 이 곳이 본디 종합병원이었다는 말을 겨우 건졌다. 층계 아래를 가리켜 보인 안내인은 멈춰서고 나는 더듬더듬 층계를 내려갔다. 훅 끼쳐오는 지하 공간 냄새가 단박 시체실을 연상시켰다. 마지막 층계참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청회색으로 휑한 실내는 흡사 반투명의 유리 공을 가로로 잘라 엎은 거대한 뚜껑이었다. 전면 벽 눈높이쯤에서 물속에 켜진 전구처럼 두 줄기 은하 빛 광원이 까마득한 천정을 향해 차츰 흐려지며 퍼져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영락없는 해돋이 직전 갓밝이였음에도 주변 어둠을 흩기는커녕 되레 내 등에 서늘한 점을 찍었다.

나는 멈춰 선 채 눈동자만 힘껏 벌렸다. 분사되는 두 줄기 빛 사이로 자그마한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는 양옆에 더 낮은 촛대를 세 개씩 세우고 무지개 형 배광에 둘려 실루엣으로 검었다. 엉겁결에 그리로 몇 발 떼는 순간 엄엄한 울림을 들었다. 내게 명중命中한 울림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기척에 다름 아니었다. 얼른 머리를 숙였다. 그것이, 십자가를 보고 터뜨린 내 작고 짧은 탄성 ‘아’의 반사음이었음을 곧 알아차렸지만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하공간의 푸릇한 고요와 둥그스름 휘었다 울려오는 반사음의 냉기로, 여기 오는 자는 한번쯤 질려보라는 축조 의도가 넘겨짚어진 건 좀 후의 일이었다. 나는 이미 얼어서 투명해지겠습니다! 납작해지고 있었다.  

흐릿한 기시감(deja vu)과 함께 다가온 검은 십자가의 이미지는 나의 ‘맨 나중 열쇠’를 쥔 이의 좌에 다름 아니었다. 내 작은 ‘아’를 저르르하게 되돌려줄 수 있는, 내 속속들이 그대로 펼쳐 들이댈 오직 하나의 존재, 나는 마침내 시공을 장악하는 이 앞에 선 것이었다. 느닷없는 대좌였다. 나는 너무 작았다. 아니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제 겹겹의 질문이 터뜨려지리라. 이미 답이 정해져 있어 구태여 식별력을 짜내려 고통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긍정 ‘예’만이 허용되는 냉엄한 질문 앞에 나는 발가벗고 선 것이었다. 이제부터 줄줄이 내 남루한 발자국들이 셈될 것이고 내 뒤쪽 컴컴한 응달이 들어날 것이고 내 뿌연 찌꺼기가 뒤집힐 것이고 내 힘에 부치는 걸 더위잡으려했던 부끄러운 손을 펴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왜 내 앞에 좁고 곧은 길 하나 그어놓고 밀어내는가, 일탈로 내닫지 못해 널름거릴 때마다 신에 불충했던 내 혼잣말들을 가장 크게 울려줄 것이다. 나는 단 한번도 ‘예’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죽어가는 이를 지켜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들은 날숨과 날숨 사이가 점점 뜨막해지다가 조용해졌다. 푸른 입술에 마지막 거품이 일기까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푹 꺼지기까지 나는 그들보다 더 안간힘썼다. 감히 그들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기억으로 가끔 뜨끔거렸다. 바야흐로 맑은 영혼 하나가 무한 고요로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의식 앞에서, 아직 이쪽 탁한 호흡 할딱거리는 주제에 안간힘이라니. 겸허랄지 순화랄지, 커다란 흐름은 거스르지 않아야겠다는 수굿함과 함께 내게 허락된 날숨의 밀도를 재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미리 호흡의 뜸을 늘리고 내리면 마지막 턱 넘기가 좀 수월하지 않을까. 그렇게 숨을 내리다 보면 침묵이 길어질 것이고 침묵이 길어지면 자연 성찰에 닿을 것이고 그 무심한 되풀이가 혹 생사여일의 지평까지 밀어주기 않을까. 그러나 거기까지, 나는 그 가상한 생각을 실연實演하지 못했다. 쑥스럽기도 했고 아직 먼 일, 필경은 마음 따가울 일을 미리 당겨 괴로울 게 뭔가 제쳤을 것이다.

그렇게 미적미적 두루뭉실 느슨느슨했으므로 가령 이런 때, 아주 조그만 십자가로도 헉하고 숨이 들이켜질 때 나는 망연할 밖에 없다. 언제 어디쯤에서 ‘예’해야 할지 막막했고 대책 없이 ‘예’할까봐 겁났다. 어금니를 물었다. 소용돌이는 속에서 쳤다. 나는 아직 아닙니다, 반발하다가 잘못했습니다, 쌀쌀 빌다가 이제부터 잘 살겠습니다, 다짐하다가.

층계 위에서 안내인의 말소리가 내려왔다. 맞물었던 어금니를 풀었다. 아, 소리가 나왔다. 둥글게 모아졌다가 되돌아온 소리는 나를 놓아주는 겁니까!? 물음인지 답인지 모를 내 속의 묵음默音과 맞물렸다. 십자가에서 돌아섰다. 층계를 오르는데, 고작 2.3분? 웬 호들갑이었지? 멋쩍어졌다. 잊어버릴 거야! 싸악 시치미 뗄 참으로 웃음을 머금고 층계로 올라섰다. 햇살이 민망했다. 그때 안내인이 웃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슨 질문인가 했다. 내게는 우리나라 말, 잊힐까요? 로 들렸다.

 

각주) *snapshot : 속사速寫, 짧은 묘사

**스페인 똘레도 따베라 박물관

 

 

계간수필 천료(2000년).

《한국문협》 회원.

수필집 : 《분홍양발》 , 《윤예선 그 사람》 , 《카미노 데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