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황태섭

K선생이 정면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황선생의 전공은 무었이오?” 일순간 정전이라도 된 듯 나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것은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 했느냐고 묻는 것이 틀림없다. 갑자기 지은 죄를 토설하라는 검사의 준엄한 취조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일행들의 동작이 멈춰졌다. 조금 사이를 두고 그 침묵을 쓸어내기라도 할 량인지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단 하십니다.” 그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일행이 저녁을 가볍게 든 곳은 이태원의 어느 피자집이었다. 피자에 포도주를 곁들인 음식은 색다르기는 했지만 나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몇 가지 다른 음식도 있었지만 혀에 겉돌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신 걸까 선생님은 2차를 제의했고 우리는 한참을 걸어서 한남동으로 내려와 순천향병원 어귀의 낙지 집으로 들어섰다.

이태원보다는 다소 어수선해 보여도 그 분잡한 골목도 시끌거리는 소리도 내게는 오히려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얼큰한 낙지볶음을 안주삼아 소주 몇 잔을 들이키며 이제 막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는데 느닷없이 선생님의 물음이 화살같이 내 가슴에 와 박힌 것이다.

내가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이 오랫동안 목을 타고 짓눌러온 짐 같은 시절이 있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할 때는 더욱 심했다. 늦게 입사한 후배가 먼저 진급해 상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동료들 사이에도 학력으로 구분 돠었다. 그런 때 에는 꿈에 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교포도 없는 둥그런 테의 고교시절의 모자였다. 어디를 가나 누구와 만나도 꼭 그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마치 모자 없이는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나는 그 모자를 벗어 버리듯이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러고는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물론 수월할리는 없었지만 학력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능력은 없는데도 야망은 있었던지 욕심을 부리다 실패도 했다. 바쁘고 고단했던지 한동안은 모자 꿈은 사라지는 가 했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다시 모자가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다는 허탈감이 굴레같이 모자로 씌워졌는지도 몰랐다. 그 무렵부터 무언가 목마름이 심해왔고 그 갈증을 해소 하기위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묵향에 끌려 서예를 시작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래도 스멀거리는 게 있어 찾아간 곳이 어릴 적 꿈이었던 문학이었다. 그것은 옛 애인을 만난 듯 반가웠지만 금방 나만의 짝사랑임을 확인하는 쓰라림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자 늦깎이 학생을 예우하듯 문단 말석에 끼워 주었다. 그러자 모자 꿈도 사라졌다. 이번엔 아주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오늘 그 모자 꿈을 다시 꿀 계기가 생겨났다. 꾸고 싶지 않은 꿈을 또 꿀 수도 있다는 일은 정말 싫다. 그러자면 배짱을 좀 부려야겠다. 그동안 십여 년의 공부가 신통치 못했다 하드래도 대학 과정으로 쳐주어서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대학이라고 다 우등생만 있을 리 없으니 뒷부분 어디쯤에 끼워준다고 별 탈이야 있을 라고….

선배 이 박사 얘기가 생각난다. 지방이긴 하지만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대학법대를 졸업했지만 고시에는 운이 없었던지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말았다. 시험이라면 늘 자신에 차 있었던, 소위 수재 급이었던 그가 받았을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도전은 계속 되었지만 실의만 커졌을 뿐, 그동안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책임감을 어쩌지 못해 뜻을 접고 말단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고부터 그의 엘리트 의식은 사라졌다. 선배는 물론 동급생이 고시의 면류관을 쓰고 그의 상사로 부임해왔다. 세월이 흐르면서는 후배들까지 높은 의자에 앉아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드디어 일어섰다. 다시 책을 잡고 주경야독으로 맹렬히 매진한 끝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뒤이어 대학에 출강도 하게 되었다. 몇 년 전 그가 러시아에 교환교수로 갔다 왔을 때 머리위에 얹혔던 털모자가 그렇게 멋져 보일수가 없었다.

회갑을 지나고 나서는 나도 꽤 뻔뻔해 졌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이루어놓은 것도 없지만 이십여 년 간 경영해온 기업이 비록 작고 돈은 벌지 못했어도 이해득실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치열함을 배웠고 그 냉혹한 경쟁 속에서도 훈훈한 인간애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는 장사를 마치 사기꾼의 야바위 쯤 으로 터부시 해왔던 소년시절의 고정 관념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세상을 진흙탕의 아수라장 정도로 생각되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의 관념도 많이 바뀌어 모든 사람은 제 각각 존재 가치가 있어 주어진 몫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사귀게 되어 꽤 많은 친구들을 얻을 수 가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실패한 삶 같지는 않은데 이제 남아있는 세월 또한 꽤 있을 테니 무얼 걱정할게 있겠는가 말이다. 친구들 말따나 내가 너무 긍정적인가? 아니 너무 뻔뻔해진 탓일 것이다.

사회적이나 문단에서도 까마득한 선배이신 K선생님도 무심히 물어본 질문이 부담이 되신 듯 술잔을 부지런히 기울이신다. 나도 이제 손주를 몇이나 본 터수에 이 정도를 소화 하지 못할 리는 없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배움은 책상머리가 전부가 아니다 라는 어릴 적의 치기를 확인이라도 하는 계기로 삼을 수가 있을 겻이다. 이제 더 이상 둥근 테의 고교시절 모자도, 꽤나 나를 주눅 들게 했던 사각 모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의 털모자 쯤은 한번 욕심을 내 봄직 하지 않겠는가.

 

 

《수필공원》으로 천료. <산영재 수필 문학회>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