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짝이 눈

 

 

                                                                                   선 화

언뜻 보면 험상궂은 인상이나 눈여겨 다시 보면 나약하고 슬픈 표정의 얼굴, 한눈은 부릅뜨듯 열린 동공인데 다른 쪽은 눈물에 짓물려 닫힌 눈이다. 한 얼굴에 짝 지어진 운명이면서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이 한 쌍은 분명 짝짝이 눈임에 틀림없다. 조각가 L씨의 성상전聖像展에서 유독 나의 시선을 집중 시킨 조각상, <부활>앞에 서 있다. 문득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고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 떠오른다. 육안으로 바라보기보다 마음의 눈으로 읽어가야 할 것 같다. 깨어 있는 영혼의 눈과 회개의 눈물이 그칠 새 없어 뵈는 죄인의 눈은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모순을 상징함인가. <부활>이란 표제에서 신을 의식한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각도를 달리하고 초점을 맞추어 보니, 모순된 인간을 긍휼히 여기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는 눈과 또 한 쪽은 그런 인간을 구원코자 간곡히 깨어있는 눈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지금 나와 마주 하고 있는 조각상은 인간의 모습인 동시 신의 모습이기도 한 이중의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다른 작품, <붓다>와 <고난>역시 같은 짝짝이 눈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들 옆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양 동공이 확연히 함께 열린 두상 조각, <사후死後>가 나란히 전시 되 있다. <붓다>와 <고난>과 <사후>, 이렇게 셋을 연결한 의도를 곰곰이 생각 해 본다.  열반 후 해탈에 이른 붓다의 길과 십자가의 고난 후 부활에 이른 예수의 길이 동일한 깨어있음의 극치임을 상징 하려 함일까…?

작품<사후>에서 드러난 얼굴은 해골의 형상 그 자체다. 휑하니 뚫린 양쪽 검은 동공이 마치 미지의 동굴 같다. 하염없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미망의 블랙홀, 그것을 통과하면 대체 그 끝자락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 일까.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 <죽음과 불>에서 보았던 해골의 이목구비가 조각상의 두상 위로 어느새 겹쳐 온다. 말년에 몸이 쇠약해 서서히 죽어가던 클레는 타오르는 불빛을 배경으로 한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 자신의 소멸해 가는 육신을 해골로 형상화 하여 그 본질만 남겨 놓으려 했다. 가장 본질적인 실재가 기쁨을 확신 시켜 주는 진짜 힘이었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양.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선언 했던 것이다. “죽음은 불과 같은 정화淨化 장치로 완성을 이루는 수단” 이라고. 만약 파울 클레의 사후死後를 두상 조각으로 형상화 시켰다면 아마도 두 눈 다 깨어 열린 동공이 아니었을까. 짝짝이 눈은 깨어진 내면의 불균형인 것을.  

L씨의 조각에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대부분 신앙과 결부되어 빚어진 형상들이다. 자기 비움을 시도하며 욕망을 초월함으로써 얻는 생명의 충만함! 돌이건 쇠붙이건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물질 앞에서 그것이 무엇이 될지 드러나기를 기다린 후 작업을 시작한다는 그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작업을 고수하며 망치와 끌로 돌에 형상을 부여 하고, 쇠를 부어 생명을 불어 넣는다. 예술가라기보다 노동자로 자칭 하는 조각가 L씨! 그래선지 그녀 작품의 형상들은 거칠고 보통이상의 커다란 손과 발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력이 넘치는 크나큰 손이 바위처럼 커다란 발과 맞닿은 채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작품,<그리스도>는 종교라는 경계마저 초월해 있다. 가부좌 하는 붓다의 형상에서 자유와 단순성을 본다는 그녀는 칠순을 바라보고 있다. 작가의 시력은 너무도 약화되어 실내에서 조차  보안용의 짙은 색안경을 써야 할 정도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된 작업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 구도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처럼.

작품 <나의 삶> 시리즈에는 두 눈 모두 열린 두상과 짝짝이 눈의 두상 사이에 자신의 자화상을 위치 시켜놓은 점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조각가 본인의 자화상 인지라 유심히 호기심을 기울여 본다. 두 눈 모두 닫힌 형상은 온전한 죄인임을 자처한 작가의 겸손이었을까. 묘한 건 한쪽 눈이 버쩍 눈썹 끝을 향해 치켜 올라간 점이다. 짓궂은 반란 같아 해학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단호하게 다문 입은 속세와 단절한 수도승의 표정 같기도 하다. 이 작품 <나의 삶>은 아마도 작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상향을 말해 주는 듯하다.

작품마다 뿜어 오는 강한 에너지! 치열한 작가의 예술 혼 같은 것이 어느새 커다란 망치가 되어 불현듯 나를 내리칠 것만 같다. 안일에서 당장 깨어나라고,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다시 보라고.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작품들을 되돌아본다. 처음엔 눈으로 오기 시작한 형상들이 속도를 내며 언어로 돌아온다. 그들은 저마다 단단한 알갱이가 되어 고약한날 우박 치듯  나를 공격해 온다. 짓 물릴 대로 짓 물렸을 나의 짝짝이 눈. 치유의 시간은 오는 것 일까……?

렘브란트의 성화, <돌아온 탕아>에는 아들이 돌아올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먼 아버지의 사랑과 죄를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의 회심이 깊이 들어 나고 있다.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돌아온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조건 없는 사랑, 용서와 같은 신성의 실재를 보게 된다. 아들은 죄의식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는 내면의 각성, 바로 이 자체가 구원이고 부활일 것이라고 신앙인들은 믿고 있는 듯 하다. 선한 목자를 기다리며 나도 어린 양이 되고 싶어진다.

우린 모두 미완未完의 눈 들인 것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송현수필문학회, 이화문학회 회원.

《천지로 가는 계단》, 《허공에서 길을 찾아》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