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우은주

우리 동네에는 유난스럽게 은행나무가 많다. 우리 집 바로 앞길은 가로수가 은행나무인데, 한여름에는 푸르른 이파리들로 터널을 이루고, 가을에는 그 터널을 노랗게 물들여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냄새!” 아이들이 은행나무 밑을 엉기적거리는 갈 지之자 걸음걸이로 지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냄새? 무슨 냄새?”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들이 땅 위를 구르는데, 그것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밟아서 짓이겨진 것이다. 거기서는 은행 썩는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작년에도 냄새가 나더니, 올해도 냄새야!” 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디지털화된 자극적 색깔에 눈이 더 가는 아이들에게는 은행잎의 노란색은 보이지 않고, 은행나무는 그저 가을이 되면 냄새 풍기는 열매를 떨어뜨리는 존재로만 보이는 듯하다.

 

“은행잎”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년 전, 내가 다니던 학교 마당에 흩뿌리던 은행잎. 그날따라 비가 내렸는데, 거센 빗줄기 때문에 은행잎이 심하게 떨어져 내렸다. 비 맞기를 싫어하는 나는 비를 피하려고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서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곳. 학교 본관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은행나무 길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순간 무슨 별천지에 온 느낌을 받았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내 머리 위에도, 내 발 밑에도, 내 눈 앞에도 온통 노란 은행잎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가리고 있던 책가방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비인지 은행잎인지 모르는 노란 빗물을 완전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맞았다. 머리가 젖는 것도,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냥 그 순간 나도 같이 노란 은행잎이 되고 싶었다.

그 때 그 노란 빗물은 무엇이었을까? 늦게 찾아온 사춘기의 방황? 20대 초반의 샌치한 낭만? 아니, 그 때 나를 적신 노란 빛깔 빗물은 아마도 내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꿈”이라는 씨앗을 깨워준 약수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 때부터 나는 꿈을 꾸는 아이가 되었으니까.

살아가면서 난 가끔 내가 경험한 노란 빗물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나이 먹어감에 따라 그 추억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내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20대 후반에 되돌아보았을 때 그 추억은 그것이 ‘자아발견의 순간’이었다는 가슴 뿌듯함을 내게 안겨주었고, 30대가 되어 돌아본 그 추억은 피곤한 인생 여정에 힘을 더해주는 피로회복제였는데, 요사이 떠오르는 그 추억은 세상  모르고 순진하던 시절의 철없는 판타지로 느껴진다. 추억도 나이를 먹나보다.

 

얼마 전, 우리 아이들과 나의 모교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얘들아, 저기가 엄마 다니던 학교야. 우리 들어가 보자!” 아이들은 별다른 느낌 없이 성큼성큼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나는 왜 그리도 가슴이 설레이는지…. 20년 전, 내 아이들을 데리고 그 곳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었던가?

학교 후문 쪽에서 언덕을 넘어 본관 앞을 지나 예전의 은행나무 길에 들어섰다. 아직도 여전히 은행나무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전에는 없었던 작은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커피를, 아이들은 핫 초코를 시켜놓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학교 안은 한산했지만, 내 귓가에는 20년 전 내가 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바쁘게 오가던 학생들의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노란 은행 나뭇잎의 터널 속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서 있던 내 모습도 보였다.

한참동안 지난 추억에 젖어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은행나무 길을 다시 걸어 나오면서 20년 전의 내 모습에게 속삭였다. “거기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줄래? 내가 가끔 와서 너를 볼 수 있도록.”

 

오늘은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어야겠다. 땅에 떨어져 더러운 얼룩을 지우는 은행을 급하게 피하기보다는, 아직도 나뭇가지에 달려 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은행잎을 바라보라고. 언젠가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 발에 밟혀 냄새를 풍기게 될지라도, 지금은 저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며 꿈을 꾸고 있는 저 잎파리들을 올려다보라고. 그리고 그 노란 빛깔 터널 속을 아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거닐어야겠다.

 

 

2006년 《계간수필》로 등단.

세종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