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김형진

저녁을 먹고 방 앞 마루에 나와 앉았는데 주인이 다가와 계곡을 향해 지어놓은 널찍한 마루를 권한다. 낮에는 열 사람도 넘는 술꾼들의 취태醉態에 밀려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데다. 주인 남자는 마루 바깥쪽 난간에 붙어 앉아 눈 아래 계곡과 건너편 절벽을 감상하라 권한다. 특히 숲에 에워싸인 절벽은 귀신 형상을 하고 있어 가끔 무당들이 찾아와 며칠씩 기도를 하는 곳이란다. 설명을 듣고 찬찬히 뜯어보아도 내 눈에는 가운데 근방에 울퉁불퉁한 곳이 보이긴 하는데 무슨 형상인지 분간할 수는 없다. 혹시 실패한 마애석불일 수도 있겠다 싶어 사람이 깎은 게 아니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자연 그대로의 신령스러운 바위란다. 어떤 달밤에는 귀신의 얼굴은 물론 도포자락까지 보인다 덧붙인다.

혼자가 되어 절벽을 마주하고 앉는다. 한동안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내 눈엔 그저 작은 절벽일 뿐이다. 내 눈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거죽에 그칠 뿐 안에까지 미치지 못한는 내 시력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고민하고 있는데 점점 절벽이 흐려진다. 그렇잖아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산중, 어둠은 금세 절벽을 덮어버린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차츰 계곡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이 사라지고 웅덩이에 고인 물이 사라지고 희끄무레한 빛만 어른거리더니 그마저 사라져 버린다. 이제 시야엔 먹물을 번져놓은 듯한 산뿐이다. 어둠 속 든 계곡 물소리가 비로소 귀를 깨운다.

물소리에 귀를 모은다. 귀청이 울리도록 높지도, 귀를 기울일 만큼낮지도 않은 소리로 무엇인가 속 깊은 사연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설법 펴는 고승의 앞에선 듯 애가 탄다. 물소리에 마음을 모은다. 큰 줄기의 소리가 중심에서 흐르고 작은 가지들이 그 옆과 앞뒤에 붙어 어떤 것은 달랑달랑 방울 흔드는 소리를 내고, 어떤 것은 휘휘 꼬리 흔드는 소리를 내고, 또 어떤 것은 강풍에 소나기 몰려가는 소리를 낸다. 마음을 모을수록 소리에 소리가 덧붙어 마음까지 흔들어 놓는다.

눈을 감는다. 물소리에 나를 맡겨보기로 한다. 본디 사람의 몸뚱이는 크고 작고,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여러 모양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크기도 길이도 굶음도 없는 마음이야 잡념만 비우면 온전한 공간이겠지. 빈 항아리에 물을 붓듯 내 안에 물소리를 채운다면 항아리가 물에 저항하지 못하듯 나도 아무런 느낌도 어떤 생각도 없어져 내 귀청에서 물소리가 사라질는지 모른다. 어깨와 등에 힘을 빼고, 팔을 늘어뜨리고, 머리는 떨어뜨리고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수록 물소리가 점점 커짐을 느낀다. 내 몸 속의 공간이 온전하지 못하듯 마음속 공간도 잡스러운 것들로 얽혀 있는 건가. 물소리가 그 잡스러운 것들에 반향反響하여 내 안에서 더 커지는 건지도 모른다.

아주 소리를 막아버리는 방법은 없을까. 양 손바닥으로 귀를 덮는다. 소리가 작아지긴 하나 그렇다고 막아지는 건 아니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귀에 밀착시킨다. 물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 볼륨을 낮춘다.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팔이 아프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꼴이람. 팔도 팔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음은 힘으로 다스려지는 게 아니란 걸 실감한다.

손바닥을 내려버린다. 귀가 멍멍하다. 물소리가 뚜렷해지면서 마음도 편해진다. 물소리 사이사이로 벌레소리가 끼어든다. 벌레소리가 관악 사이로 흐르는 현악처럼 살갑다. 온몸에 시원한 기운이 스민다. 그래 그냥 두는 거야.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며 내버려두는 거야.

어느 즈음일까. 인기척에 돌아보니 주인남자의 은근한 목소리가 다가온다.

“산골이라 야심하면 쌀쌀해지는데 그만 들어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