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上 회장

 

 

                                                                맹광호

우리는 그를 ‘상上 회장’이라고 부른다. 시골 고향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 모임의 종신회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를 서울에 올라와 사는 친구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서울 모임에도 회장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가 서울 회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러왔다. 처음에는 다분히 장난삼아 그렇게 불렀지만 지금은 이것이 아예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렸다.

우리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도 아니고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돈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 그를 우리가 상 회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늘 우리 모두를 보살펴 주는 형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친구들을 배려하고 챙기는 방식은 참으로 탁월하다. 가령 새해 첫날이 되면 아침 일찍 여기 저기 떨어져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복을 빌어주고 평소에도 가끔씩 안부 전화를 걸어 와 우리를 감동시키곤 한다. 우리를 부를 때도 우리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 이름을 넣어 아무개 아빠 아무개 엄마로 부르는 등 그 자상함도 범상스럽지가 않다. 서울에 사는 친구 중 어느 누구의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아이들을 결혼시킬 때면 작은 버스를 전세내서 시골 친구들 부부를 모두 이끌고 올라와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한다.

주위 사람을 챙기는 그의 이런 남다른 관심과 지도력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와 나는 각각 1반과 2반의 급장을 했다. 6·25 전쟁 끝자락 무렵이던 그때, 무슨 연유였는지 5학년 때까지 4개 반이던 것을 2개로 나누어 합반을 하는 바람에 한 반에 거의 100명씩의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급장 한 사람이 학생들을 통솔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몸집도 작고 마음도 여린 내 경우, 특히 남학생들을 통솔하는 일이 아주 어려웠고, 그래서 어지간한 궂은일은 내가 직접 해버리고 아예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반을 운영했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공부나 하던 나는 짓궂은 남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고, 이런 일로 너무 속이 상해 학생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여학생들로부터는 동정도 받고 또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 남학생들로부터는 더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상 회장은 남자 아이들로부터 인기가 많았고, 그래서 매사를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처리하는 바람에 아주 쉽게 반장 일을 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는 권력을 가지고, 그리고 반 아이들은 거기 기생하는 변절적 순응주의로 그의 부하가 되었지만, 우리의 상 회장은 아이들과 함께 뛰어 다니며 놀고 때로는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장난도 함께 치며 놂으로써 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부도 아주 잘했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호남에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광주서중을 거처 광주일고에까지 진학을 해서 우리는 그가 장차 아주 큰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기대를 받던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시골에 남아 일찍 직업전선에 뛰어드는 걸 보고 우리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가 꼭 그렇게 해야 할 집안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마음 고통도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고향은 자기가 지키겠노라고 큰소리치며 졸업 10주년, 20주년 등 기념 때가 되면 앞장서 전체 동창모임을 주선해서 은사님들과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 주곤 했다.

그런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 6, 7년 전이다. 그래도 그때는 다행히 몸 한쪽을 잘 못 쓰는 정도에 그쳐 이후로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면서 높지 않은 산도 오르기 시작했고 그런 몸으로 서울에서의 애경사에도 몇 차례 더 참석을 했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달에 다시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일종의 혈액암 진단을 받고 쓰러졌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전남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고 곧장 그곳 병원에 내가 아는 교수에게 부탁도 하고 가끔 치료 상황을 점검도 했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아 지난주 월요일 하루 당일치기로 서울에 사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장성엘 다녀왔다. 일단 급한 상황은 넘긴 상태에서 퇴원을 하고 두 주에 한 번씩 외래로 검사와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려가기 전날 전화로 우리의 문병 계획을 미리 알리긴 했지만 막상 우리의 방문을 받은 친구 내외가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밖출입이 쉽지 않은 상황인데도 친구 내외는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경치 좋은 장성댐 부근에 식당예약까지 해 놓고 있었다. 단정하게 이발도 하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맞는 친구를 보며 몸져 누워있을 친구 손이나 잡아주고 올 수 있을 줄 알았던 우리는 적잖이 안도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소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는 친구를 부축하고 식당까지 갔고 마치 그에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한동안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갑작스런 병으로 친구들을 잃게 되는 일이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겠지만, 평소 누구보다 건강한 몸으로 우리 모두를 챙겨주며 보살펴 주던 그가 겹치는 중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니 모두들 맥이 빠진 상태다.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상 회장에 대한 우리 모두의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다.

밤 늦은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돌아오면서 우리들의 짧은 방문이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 것에 만족하며, 그가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계속해서 우리의 든든한 상 회장으로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월간 《에세이플러스》로 등단(2007).

수필집 《동전 한 개》, 칼럼집《건강가치, 생명가치》 등.

전 가톨릭의대 학장, 현 명예교수, 한국 의사수필가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