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이항녕

'더 높은 곳에'

 

좋은 옷을 입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몇 발자국만 떨어져 보면 좋은 옷이나 나쁜 옷이나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몇 시간만 지나면 맛있는 음식이나 맛없는 음식이나 다같이 소화되기는 마찬가지다. 훌륭한 집에 살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좀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훌륭한 집이나 그렇지 못한 집이 다같이 성냥갑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사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외곬로만 나가기가 쉽다. 당장에 눈앞에 일어난 사물에 대해서 덮어놓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좀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고 좀더 공간적 여유를 가지고 사태를 관망할 줄을 모른다. 오늘의 현실 그것은 하나이지만 이것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 평가는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 시간적으로 보아 오늘을 기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1년 후를 기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십 년 후나 백 년 후를 기점으로 하여 생각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천 년이나 만 년과 같이 장기적인 장래를 기점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더욱 나아가서는 영원이란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공간적인 관찰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하다. 어떤 사태를 바로 눈앞의 지척에 놓고 그것을 보는 방법도 있고 십 리라는 거리를 떼어 놓고 보는 방법도 있고 때로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 리나 만 리라는 장거리에서 내려다보는 방법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서 멀리서 바라다보는 방법도 있고 나아가서는 우주선을 타고 달세계에 가서 쳐다보는 방법도 있으며 더욱 나아가서는 더 멀리 태양계를 벗어난 무궁한 대우주의 극에서 훑어보는 방법마저 상상할 수 있다.

안목이 낮은 사람일수록 어느 사태에 직면하여 당황하게 되고 안목이 높은 사람일수록 어느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당장에 보면 슬픈 일이라도 좀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보면 그것이 기쁜 일이 될 수 있으며, 당장에 보면 추잡한 것같이 보이는 것이라도 좀더 공간적 여유를 두고 보면 미려美麗하게 보이는 수가 있다.

우리는 얼굴이 못났다고 해서 비관할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 같은 추남도 진리를 사랑하는 그의 곧은 마음으로 그는 전 인류의 마음의 애인이 되었다. 우리는 가난하다고 비관할 것은 없다. 예수는 집도 없었고 옷도 남루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아무런 재물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사랑의 실천으로 그는 전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벼슬이 낮다고 비관할 것은 없다. 공자는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며 좀더 일할 수 있는 벼슬자리를 구해서 동분서주하다가 결국은 실패했지만 그의 높은 뜻으로 왕이나 천자까지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자손이 적고 친척이 적은 것을 비관할 것은 없다. 석가는 친처자까지도 버렸으나 그의 자비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를 어버이처럼 사모하는 사람들이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가?

괴테는 실연의 쓰라림을 당하면 그것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시켜 슬픔을 무한한 희열로 전환시켰다. 우리나라의 김삿갓은 평생을 불우한 방랑으로 지냈지만 그것을 시로 승화시켜 평생을 너그럽게 살았다. 이 모두가 좀더 높은 곳에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부러운 사람들이다.<독서신문, 1972년>

 

 

● 작 품 : 이항녕의 <더 높은 곳에>

● 참석인원 : 12명

● 사 회 : 염정임

● 정 리 : 이경은

● 일 시 : 2009년 5월 16일

●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사회 : 안녕하십니까. 목마른 땅을 적셔주는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중에 나오시느라 불편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지금부터 《계간수필》 제 58회, 2009년 겨울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법학자이면서 문인이었던 소고小皐 이항녕 선생님의 작품 <더 높은 곳에>를 합평에 올렸습니다. 선생님은 향년 94세로 지난해 9월에 돌아가셨으니까 1주기에 때맞추어 작품을 조명하게 되어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인으로서보다는 법학자, 교육자, 대학총장으로 더 알려진 분이지만 스스로 “법학은 외도요, 호구를 위해서 지워진 짐스러운 전공이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분이 평생을 두고 하고 싶은 일은 문학이었습니다. 중학 시절부터 문인의 길을 꿈꾸다가 우여곡절 끝에 법학교수가 되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을 품에 안고 살다 가신 분입니다. 바쁜 공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본질로 돌아가 인생을 관조하고 인간을 탐구하던 그분의 심오한 통찰력은 이 작품 외에도, 4권의 수필집에 실린 300여 편의 수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하자면 재야在野의 문단에서 외롭게 작품창작에 혼신을 바친 분이지요. 오늘날 전업수필가로서 누리고 있는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또 하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알려진 대로 괴테, 하이네, 쉴러, 톨스토이 같은 대가들이 한결같이 법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작가들인데, 법학과 문학 사이에는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법학교수이면서 작가이던 이항녕 선생님의 눈에 비친 법학과 문학의 관계를 짚어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작가론을 김진식 선생님이, 작품론을 변해명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먼저 김진식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진식 : 이항녕 선생은 191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1학년(1934) 때 동아일보가 주최한 농촌계몽이 주제인 장편소설 공모에서 《일륜차》라는 소설로 응모했다가 낙방합니다. 이때 당선자는 바로 《상록수》를 쓴 심훈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한 선생은 심혈을 기울여 쓴 단편소설을 들고 자하문 밖의 이광수 선생의 집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광수는 그에게 “문학을 가지고 호구하기 어려우니 법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항녕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법학과로 진학합니다. 이때 경성제국 대학 법학과를 홍진기(중앙일보 설립자), 문홍주(전 문교부 장관)와 함께 다닙니다.

당시 법학과의 조선인 학생은 두 부류로 갈렸다고 하는데, 민족주의에서 나와 사회주의의 색채를 띤 사람들과 민족주의에서 후퇴해 인문주의 색채를 띤 사람들입니다. 앞 사람들은 마르크스 레닌의 책을 읽고, 뒤 사람은 관념철학과 문학서적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자전적 수필집 《작은 언덕에 서서》(1978)에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자랑스럽지 못하게도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리고 민족을 위해 투쟁하다가 학업을 포기한 (앞의) 학우들을 낙오자라고 비웃었다."라고 하며 자신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이항녕 선생은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경남 하동군수(1939년)가 됩니다. 50년이 지난 1991년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에서,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했던 자신의 친일 행적을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민족을 배반한 부끄러움에 공직을 뒤로 하고 부산 범어사 밑 청룡초등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고, 마산중학교(46년), 양산중학교(48년), 동아대 교수(49년)를 거쳐 홍익대 총장(72년~80년)을 지내고, 대한민국 학술원에 선임됩니다. 80년 3월 홍익대 이사회의 중임 결정을 사양하고 물러나면서, “10·26사태 이후 풀려나온 교수와 학생들을 보니 혼자 편하게 산 데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금할 수 없었다.”며 유신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60년 민주당 집권 시 잠시 문교부장관을 역임할 때에 교육계에 들어선 계기를 “해방이 되면서 나의 과거 행적이 부끄러워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교육기관에 피신했다.”고 표현하면서, “35년 간의 교육계를 돌아보니 어쭙잖은 지식 쪼가리를 잘라 팔며 호구해 오면서 겉으로는 학자연했다. 하고 싶은 말을 보신을 위해 참았고, 하기 싫은 말이라도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거침없이 말했다.”며 반성을 깊이 하십니다. 자전 수필집 《낙엽의 자화상》에서는 해방 직후 이광수를 찾아가 친일행적을 사과하라고 권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실렸지만 변함없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같은 해 KBS 8·15 특집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여 과거를 반성합니다. 이항녕 선생은 이처럼 평생을 자기에 대해 반성을 하며 지냈습니다.

오늘 이 작품을 읽으니까 세상의 모든 행복이나 모든 일들이 하나의 지식보다는 지혜, 현실적 규범적인 삶보다는 종교적인 근원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신 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한평생 윤택한 것을 부끄러워했으며, 자기 시대를 속죄하려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점이 그의 문학 작품에도 많이 녹아 있습니다. 자녀는 6남 2녀로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서로는《객설록》(1962), 《낙엽의 자화상》(1977), 《작은 언덕에 서서(나의 인생관)》(1979), 《깨어진 그릇》(1980), 《청산에 살리라》(1992)가 있고, 법에 관한 책들도 다수 썼습니다.

사회 :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변해명 선생께서 이 선생님의 작품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변해명 : 제가 참고한 수필집은 그의 네 권의 수필집 중 《낙엽의 자화상》(1977), 《깨어진 그릇》(1980), 《작은 언덕에 서서(나의 인생관)》(1979), 의 세 권이고, 《客說錄》(1962)은 구하지 못해서 읽지 못했습니다.

수필 <더 높은 곳에>는 《낙엽의 자화상》과 《깨어진 그릇》 두 곳에 실려 있습니다. 이항녕 씨의 수필을 일별해 보면 교육자로서 교육을 위한 교훈적인 글과 법학자로서의 그 분야의 글,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양심의 고백 같은 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다소 교훈적인 것이 담겼으나 제가 읽은 수필 중 가장 순수한 수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20대에 일본 식민지하에서 하동, 창녕군수를 역임했고, 30대에 해방을 맞아 93세에 타계하기까지 교육자와 법학자로서 살아갔지만 젊은 날에 군수를 지낸 죄책감을 평생 지니고 살다 간 양심 있고,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던 용기 있고 강직한 학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면서 마음속에 품어 고향으로 지녀 누린 것은 문학입니다. 그 흔적은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김진식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언덕에 서서》 중 <나의 讀書歷>(1982)을 보면, “……내가 법학과를 택한 것은 사실 본의는 아니었다.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1학년 때 동아일보에서 농촌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 공모에 《일륜차》라는 소설로 응모했다가 낙방하고,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되었지만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또한 1937년 봄(22세) 심혈을 기울여 쓴 단편소설을 들고 춘원 선생을 찾아가서 최후의 비평을 청하였더니 “문학적 소질이 대단한 것 같지 않고, 또 지금 사회 형편으로서 문학을 가지고 호구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차라리 법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법학을 공부하지만 군수 시절에도, 해방이 된 뒤에도 춘원을 찾아다니며 문학에 애정을 버리지 못했다.”라고 <나의 교우록>에서 쓰고 있습니다.

1965년 국제 펜클럽에 가입 정광용, 최정희, 전숙희, 홍윤숙, 안수길, 이헌구, 이호철, 남정현 등 ‘라운드클럽’을 만들어 화양동에 있는 모윤숙 선생 댁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는 것으로도 그가 문학에 애정이 컸음을 볼 수 있습니다. ― 《낙엽의 자화상》22p 중.

그는 문학을 못하고 법학을 한 것이 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아갈 한으로 남습니다. “나는 문학을 단념하고 법학을 택했는데 그 결과로 일제 식민지의 말단 관리가 되어 그들의 주구로서 공출과 징용으로 동족을 잔인하게 괴롭혔고, 나의 희망대로 문인이 되었으면 동족 앞에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평생 후회로 남겨진 것입니다.

수필 <더 높은 곳에서>는 그런 한과 아픔을 넘기고 스스로 자신에서 벗어나고 싶은 시기, 즉 자기가 짓고 들어간 고치에서 스스로 탈피하여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돌아온 연륜에 쓴 글로, 더 높은 곳을 향하면 인간적 욕심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스스로 말하려는 의도가 담긴 글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순되고 갈등을 하게 되는 두 개의 관념을 지양하여 보다 높은 데를 향하면 치우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평상의 측면에서 삶의 이치를 터득한다는 주제의 글로 보았습니다. 내용이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보다 다소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주제를 지향하는 느낌이 있으나, 서사적인 문장으로 간결하고 다각적인 예를 들어 열거와 비교, 대조의 수법을 쓰고 있으며, 결미가 전체를 함축시키며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주고 있습니다.

작품 <깨어진 그릇>만큼 그 사람을 느낄 수 없는 글이나, 그가 지향하는 이상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 많은 책을 읽고 철학과 인생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항녕 선생은 청룡초등학교와 양산농업전문학교를 거쳐 동아대학의 교수가 되지만, 본인의 희망대로 법학이 아닌 철학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1950년 부산대학으로 옮기면서부터 학칙에 따라 법학전공자는 법학교수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철학교수의 자격을 상실하고 법과대학의 법철학 교수가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그 후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로 옮기면서도 줄곧 법철학과 민법을 가르쳤지만 “아내가 가족을 위하여 밥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읽기 싫은 법률 책을 다시 읽었다.”고 고백하실 만큼 그분의 소망은 사회학이 아닌 인문학 특히 철학과 문학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김영만 : 앞으로는 사회자께서 작가선정의 경위랄까 그 배경에 대해 조금 말씀해주시면 토론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작품인데, 지금 읽은 이 글은 수필로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나의 잠언(箴言)인데, 이런 글은 사실 이항녕 선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문장도 “…하고, …하고” 하는 식의 긴 만연체로 이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휘 또한 너무 안이합니다.

구성으로 보아도 단락이 분명치 않아 주제의식이 잘 드러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홍익대총장 재직할 때에 쓰신 것 같은데, 공자 석가 예수를 더 높은, 그리고 더 먼 거리에서 본다면 결국 하나일 수 있다는 통일교적 시각의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호형 : 저는 이 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앞에서 김영만 선생께서 안이하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첫머리부터 “좋은 옷을 입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 할 것은 없다.”라고 쓴 것을 보면서 너무 윤택하게 살아서 이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니 석가니 소크라테스니 하는 성인들을 내세웠는데, 일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사람들을 예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요. 차라리 주변에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을 예를 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또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쓸데없는 말이 많아요. ‘다같이’, ‘…서는’ 같은 쓸데없는 조사가 많습니다. 불필요한 말들이 많아서 읽기가 불편하고, 누구나 알 만한 얘기를 굳이 성인의 예까지 들어서 왜 했는지 모르겠어요.

최병호 : ‘더 높은 곳에’ 라는 제목만 따져보면 공간적인 상황을 얘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표현된 내용을 보면 일단은 의식주의 좋고 나쁜 것을 얘기한 것인데, 시간과 공간 관계에 일정 거리를 두고 보면 뭐가 더 좋고 나쁘고 특별한 것이 없는 것이다, 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런 높은 안목을 가지고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임하더라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는 시각과 시점 등을 넉넉히 살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고 있고, 그게 바로 ‘삶’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더 높거나 낮거나 수평적으로 바라보든 간에 그렇게 따로 현실에서 떨어져서 바라보는, 마치 ‘숲을 바라보는 자세’를 ‘더 높은 곳’이라는 말로 나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미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괴테를 마지막으로 놓고, 여러 가지 고민들을 승화해서 “한없이 부럽다.”라고 이렇게 쉬운 말로 정연하게 문리를 전개할 수 있는 점에서 일단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강호형 선생님의 말씀처럼 문학적 표현의 응축성은 조금 걸립니다. 본문에서 “몇 시간이 지나면 맛있는 음식이나 맛없는 음식이나 다같이 소화되기는 마찬가지다.” 라고 했는데, 사실 맛있는 음식이 반드시 소화가 되고 안 되느냐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내용이고, 산해진미만이 꼭 맛있는 음식도 아니거든요. 이런 부분들이 문학적으로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그 시대에 이 정도면 참으로 돋보일만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권 : 편수관을 할 때 교과서에 이 분의 작품 <깨어진 그릇>을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그 글에 보면 그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관리 노릇을 한 것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교육에 봉사한다고 하였는데, 이 글은 선생의 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속죄’의 느낌이 없어요.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정신세계가 너무 높아서 손에 닿질 않습니다. 그래서 실감이 안 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 같은 사람은 등 따습고 배부른 게 더 좋지, 소크라테스와 김삿갓 같은 인생이 뭐 그렇게 좋은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문장에 들어가 보면 글의 첫 문장에서 “좋은 옷을 입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몇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좋은 옷이나 나쁜 옷이나 구별이 안 된다.”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가 좋은 옷이냐 나쁜 옷이냐를 걱정하는 것은 ‘구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털옷이 좋은 옷이고 날씨가 더울 땐 베옷이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게 정상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그리고 “안목이 낮은 사람일수록 어느 사태에 직면하면 당황하게 되고, 안목이 높은 사람일수록 어느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건 ‘바른 성품’의 문제이지 ‘안목’의 문제와는 별개라고 봅니다. 안목은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운 쪽이지, 담력있고 침착하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것을 읽으면서 아주 훌륭한 말씀이지만 실감이 나질 않고, 이항녕 선생의 참모습이 별로 나타나지 않은 글이라고 보았습니다.

김선화 :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첫 번째로 생각한 것은, 이 글대로라면 세상에 근심할 일이 없는 ‘초월적 여유’를 느꼈습니다. ‘승화’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문장으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가를 종종 느끼고 있거든요. 물론 문장 그대로 되면 좋지만, 현실에서 절박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의 끝에 “괴테는 실연의 쓰라림을 당하면…… 한없이 부러운 사람들이다.” 라고 했는데, 이 분이 이 부분에 많은 말을 아껴서 담아두고 있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쉬웠습니다.

오경자 : 앞에서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저도 같은 생각이라서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경은 : 문우회의 많은 분들은 이 분과 동시대를 살아오셨기에 문학과 실제의 삶을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저는 이 분을 잘 모릅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새삼 세대 차이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지 이 작품만으로 이 분에 대한 느낌을 말하려고 합니다.

우선 이 글은 1972년 <독서신문>에 실린 글이므로 약간의 목적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를 인용하셨거든요.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계몽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기 고백체의 ‘참회 글’처럼 느껴집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많은 성인들의 거룩한 삶의 모습 속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나도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을 오히려 역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항녕 선생님께서 평생을 참회하셨다고 하셨는데, 사실 참회에는 ‘관념적인 참회’와 ‘실천적인 참회’가 있거든요. 전자는 그저 글이나 책을 통해서 하는 소극적인 것이고, 후자는 자기의 참회하는 모습을 사회에 실천하고 봉사하는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분이 교육계에 투신하여 아이들을 가르치신 일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회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만 글 속에서만….

사회 : ‘글로써만 참회한 것 아닌가’라는 이경은 선생님의 궁금증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항녕 선생의 일제시대 4년 동안 지방군수로서 나라와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는 자책은 <깨어진 그릇>, <상록수>, <낙엽의 자화상>등 많은 수필들 안에 담겨있습니다. 수필 이외에도 연작시 <척금록滌襟錄>, <백운부白雲賦> 같은 한시漢詩 속에도 자책하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참회의 글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몸으로 감당하는 속죄의 삶이 아니었나 싶어요.

해방 후 미군정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받지만, 일제 치하에서 녹을 먹던 이가 어찌 새 나라의 관리가 될 수 있겠느냐며 사표를 냅니다. 괴로운 마음에 승려가 되어 입산수도하려 했으나 어린 것들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어찌 하실라우?”하는 아내의 울먹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마침내 처자를 거느리고 범어사 사하촌의 청룡초등학교에 부임하게된 것은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속죄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지요. 낮에는 벽지농촌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범어사에서 참선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당시로서는 선생에게 커다란 위로였을 것입니다.

1965년 고대 교수 시절 한일협정반대 교수단 집회에 앞장섭니다. 선생님이 한일협정반대에 앞장서서 정치교수로 지명수배자가 된 데에는 남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정부의 압력으로 대학에서 해직당했다가 1967년 복직되었습니다.

이경은 : 네. 그러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응백 : 잘 모르겠지만 느낀 것이 많습니다. 우선은 맞춤법이 많이 틀린 게 눈에 들어옵니다. ‘사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같은 표현은 좋지 않고, ‘방법’도 ‘경우’로, ‘쳐다보는’도 ‘내려다보는’으로 고쳐야 맞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미관말직에 관한 이야기도 맞지 않습니다.

또 참회록인가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고 보여집니다. 느낀 점이 많습니다.

사회 : 여러 회원 분들의 진지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회장님께서 마지막으로 총평을 해 주시지요?

허세욱 : 아까 합평 작품 선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희가 이 잡지의 창간호부터 이 ‘집중조명’을 해 왔습니다. 우선은 선정의 기준은 그 작가의 제일의 작품이 아니라 ‘대표성’이 있는가를 보고, 둘째는 그 작품이 ‘토론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합니다. 너무 완벽한 작품보다는 우선은 작품이 흠이 있어야 반론과 논쟁거리가 되거든요. 그래야 이게 ‘도마 위에 올린 고기’가 된다는 말이지요. 이 점을 참고해 주십시오.

오늘 드물게 객관적이고 비평성이 강한 합평회가 됐습니다. 저도 이 작품을 우선 현상적으로 분석을 했더니 크게 세 개로 나누어지더군요. 이 수필의 사건, 공간 문제, 시간문제입니다. 수필에 있어서 어떤 사건의 문제는 크게 고집해서는 안 되고, 공간적인 문제도 협착한 입지에서 관철하지 말고 조금 더 광활한 공간에서 보고, 시간문제도 급히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공통점은 현대의 생활이나 현상에서 일탈을 하자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 밑바탕에 깔린 것은 회원들이 말씀하셨듯이 종합적으로 볼 때 자기의 학력과 경력에 따르는 반성, 고백 등등의 콤플렉스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서 ‘자기의 포괄적인 과거’를 뛰어넘고 싶었나 봅니다. ‘초극’과 ‘반전’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초월이나 반전에 대한 염원은 이 분의 고향이나 성장배경으로 봤을 때 납득이 갑니다.

공자는 4절四絶 ‘毋意 毋必 毋固 毋我’에서 ‘자의대로 하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고집을 부리지 마라, 자기만을 내세우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이 글에서도 여기에 대한 해석이 나오죠. 그리고 반전은 특히 노자가 주장하는 얘기인데, “反者는 道之動이라.(뒤집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입니다. 그런 것들이 밑바탕에 깔려서 이 글을 쓰지 않았나 짐작을 해봅니다.

몇 가지 부정적인 면도 발견됩니다. 이 분은 반전을 강조하기 위해서 너무 억지로 예를 든 것이 있습니다. 아까 이응백 선생님께서도 지적을 하셨지만 뒷부분에 공자가 미관말직을 했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를 했다고 하는데, 이 두 가지가 다 사실과 어긋난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제후의 마름 같은 것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마 미관말직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그러나 이 분이 수토를 관리하는 6경의 하나인 ‘사공’이라는 큰 벼슬을 한 분입니다. 6개 부처의 장관 중의 하나를 한 것이거든요. 수토를 관장한다니까 아마 수문이나 땅을 만지는 사람으로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산동 땅은 황하의 하류 마지막 입구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도 황하를 관리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요직이죠. 그러니까 미관말직은 맞지 않습니다.

그처럼 과도한 강조를 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를 ‘우리 인류의 마음의 애인’이라고 한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그이의 의리나 논리나 철학에 대해서 존중할지언정 이렇게 보는 것은….

또 아까 최병호 선생께서 지적하신 대로 “몇 시간이 지나면 맛있는 음식이나 맛없는 음식이나 다같이 소화되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했는데, 사실 맛있는 음식은 맛으로 먹지 소화를 생각하며 먹지는 않거든요. 이런 모든 것들이 현실감이나 소박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6명의 성인과 위인들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까지 구체화했나 생각해 보면, 이 분은 자기의 한평생을 뛰어넘어 초극하고 반전을 하려고 노력했던 같아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항녕 선생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제목처럼 더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계시하고 싶은 ‘지혜’로 본다면, 이 작품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 : 이 글은 선생님이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던 무렵 쓴 작품입니다. 평이한 문장이지만 인생철학의 깊은 사유가 배어 있습니다. 진실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실존조건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가질까 걱정하는 생존의 마당에 있지 않고 역시 ‘더 높은 곳’에 있음을 통감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다른 많은 글들 속에는 특히 일제시대 관리를 지낸 것에 대한 참회의 염念이 진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아무도 돌 던지는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참회를 멈추지 않은 선생의 삶에 각별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소의 <참회록>, 어거스틴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 등 여러 사람들이 수필형식으로 된 장편의 자기고백서를 역사 속에 남겼습니다. 수필이 근원적으로 자기성찰의 글이긴 하지만 참회하는 마음을 좀더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제는 여전히 우리 수필가들 앞에 놓여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문인이면서 법학자인 이항녕 선생님이 바라본 문학과 법학의 관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여러 편의 수필이 있는데 <문학과 법학>이라는 수필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법학은 법조문에 의해서 사람을 심판하지만, 문학은 법조문에 의해서 심판당한 사람들을 재심판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문학이 법학보다 상위규범인 셈이지요. 어느 시대나 문학에 거는 세상의 기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괴테 등 많은 법률가들이 문학으로 전향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싶습니다.

오늘 합평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의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