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수필가의 八十 회고록⑦|

 

지나온 발자취 (1)

 

 

                                                                                       김규련

헤치고 지나온 팔십여 년의 시공을 문득 뒤돌아본다.

한 줄기 바람 같고 한순간의 꿈 같고 떠 흐르다 사라진 한 조각 구름 같다고 도인의 입버릇처럼 말할 수가 없어서 부끄럽다.

부닥치는 현실은 늘 녹록하지 않았다. 꼬였는가하면 풀리고 뚫렸는가하면 막히고 글썽임과 반짝임이 교차하는 생의 여로를 힘겹게 지나왔기 때문이다.

내 귀가 빠지고 탯줄이 묻힌 곳은 하동포구 마을이다. 나는 아버지 김영교金永敎와 어머니 류문중柳文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춘경한의원春京漢醫院을 운영하는 한의사이고 하동향교의 전교이셨다. 허나 환자진료보다 벗님들과 한시 읊고 산천경계 유람이며 풍류를 더 즐기셨다고 한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아버지의 상여가 섬진강을 거슬러 구불구불 돌아 산으로 갔다. 그날 상두꾼들이 요령을 흔들며 불러대던 향도가(香徒歌)는 내 가슴 깊은 오지에 설움 타는 실개천이 되었다고 하리라.

날이 갈수록 가세는 쇠락해 갔다. 내가 경남중학교(6년제)를 마칠 무렵은 가산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가난과 병고는 사이좋은 남매처럼 늘 함께 따라다녔다. 나는 폐결핵을 앓으며 해방된 이듬해 가까스로 졸업할 수 있었다.

동기생들은 서울 명문대학으로 진학하는데 나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결핵약 「파스」 두어 뭉치 싸들고 낙향해야 했다. 그때의 심정은 열패감과 자기 연민과 서러움으로 입술 깨물며 눈물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가을에 고등학교 교원자격 검정시험에서 공민과(일반사회과) 자격증을 따냈다. 비로소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폐병을 완치하려고 약과 개소주 한 통 마련해서 어머니가 주선해 주신 지리산 칠불암으로 찾아갔다.

그 깊은 산사에서 여여如如스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분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마치고 입산해서 반야심경을 영역하고 계셨다. 그 분의 시중을 들며 삼 년 동안 영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 인연, 그 덕으로 50년 초,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가슴 깊숙이 화석처럼 굳어있던 한이 조금씩 녹아내렸다고 할까.

교사 발령이 났는데 임지가 뜻밖에도 낯설고 생소한 경북 군위중고교였다. 그래도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했다. 남녀공학으로 전교생이 700여 명이었다. 22세의 총각 영어선생이 왔다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모두 대환영이었다. 영어선생 결원으로 영어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교편생활이 적성에 맞는지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즐거웠다. 그러나 부임한 지 겨우 삼 개월이 지난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군에 자원입대해서 제2군단 정훈부 문관으로 임관됐다. 나의 임무는 정훈부 병사 수 명과 함께 피난민 보호와 인민군 치하에 있다가 수복된 주민들 상대의 선무공작, 전사자의 신원확인, 그리고 대적귀순 방송 등이었다.

왜관 전투와 다부동 격전지에서 전사한 국군과 UN군, 인민군 장병들의 처참한 시체를 보고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땅의 백성들과 산천초목과 하늘이 통곡할 아비규환의 지옥 그 자체였다. 병자호란도 임진왜란도 이토록 처참하지는 않았으리라.

삼 년 동안의 전투가 휴전으로 총성이 멎었다. 생활기반을 죄다 잃고 폐허의 땅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난과 굶주림과 뿔뿔이 흩어진 이산의 아픔을 견디며 재건의 삽을 들어야 했다.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고향의 집은 불타버리고 어머니와 형은 진주시에 나와 살고 있었다. 학교는 폭격으로 반파되고 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겨우 400여 명이 등교하고 있었다. 나의 스승이신 여여스님도 향방이 묘연하여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첫사랑의 그 소녀도 자취 없이 사라졌다. 연모의 정을 별처럼 하늘에 띄워두고 밤 들판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비련의 홍역을 앓으며 한 해를 보내고 새봄을 맞았다. 황폐한 나의 영지에 구원의 천사가 찾아왔다. 그녀는 미션하이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지방명문가의 규수였다. 결혼과 동시에 허탈과 방황을 털어내고 새 삶의 터전에 굳건히 설 수 있었다.

사람의 한 뉘에는 세 번의 탄생이 있다고 할까. 모체의 자궁에서 빠져나올 때, 짝을 만나 혼인할 때, 직장에서 정년으로 물러날 때, 운명은 달라질 수 있다.

나의 교단생활은 유랑극단의 곡예사처럼 경북 여러 고을을 십여 년 떠돌다 4·19 혁명으로 세상이 뒤바뀔 때 겨우 대구시로 진입할 수 있었다. 교육계에도 인맥과 학연과 지연이 있어 검정고시 출신의 하동 촌놈이 도시로 진출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대구시 변두리의 신설 중학교에서 근무한 지 이 년 만에 폐병이 재발했다.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하고 요양에 들어갔다. 다행히 ‘파스’, ‘아이나’, ‘스트렙토마이신’같은 치료약이 많았다. 군위군의 청화산 법주사에서 치른 투병생활 이 년 동안 무료하고 공허한 공백의 시간을 메우려고 독서에 몰입했다.

주로 불교경전과 그에 관한 서적과 고전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이태준의 <문장강화>며 이은상의 <무상>등을 탐독했다. 어쩌다 영미 단편소설도 읽었다.

건강이 회복되어 직장에 돌아와서는 영어선생인 나는 영문학보다는 국문학에 더 관심이 쏠렸다. 일자리도 대구시립의 명문여중이었다. 안병욱의 《사색인의 향연》, 《너와 나의 만남》, 김형석의 《철학입문》, 《아름다운 사색》, 《고독이라는 병》, 《이성의 피안》 등에 푹 빠졌다.

60년 대 중반에 영남수필문학회에 가입해서 김시헌, 이원성, 정혜옥 등과 함께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수필창작에 관한 강좌도 없고 창작기법에 대한 참고도서도 없었다. 물론 등단제도도 없었다.

각자가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수필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수필전문지는 김승우 발행인의 《수필문학》이었다. 그 월간 문학지에 작품이 세 번쯤 실리면 기성작가로 인정됐다. 나의 작품인 <강마을>과 <칠안저고리>와 <까치밥>이 연달아 게재됐다.

김승우 씨로부터 격려의 편지가 왔다. 나는 긍지와 희망을 가지고 수필 창작에 몰두하게 됐다. 두보杜甫 선생의 가르침인 <독파서만권 하필여유신讀破書萬券 下筆如有神>과 <어불경인 사불휴語不警人 死不休>를 등불로 삼고 글쓰기를 계속했다.

유신정치 시절의 장학사는 교직의 꽃이었다. 나는 68년도 봄에 대구시 교육청 장학사로 발탁됐다. 허나 장학사는 악취 풍기는 독초의 꽃에 불과했다. 장학지도라는 숭고한 사명으로 뛰어다녔지만 공술, 공밥, 공차에 촌지 봉투도 챙기는 부끄러운 관습도 있었다. 최음제 같은 그 풍조에 나도 물들어 갔다. 나는 속물로 타락하면서 수필문학이 나를 버리고 떠나는 비애를 느껴야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필쓰기는 나의 운명인 것을. 나는 시골 중고교로 나갈 것을 지원했다. 70년 9월초, 초임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임지는 상주군 모동면에 있는 중모중종합고등학교였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추풍령에서 백화산으로 오르다 보면 고대 잉카제국 같은 고산지대 마을에 학교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보람 있고 행복한 이중생활을 했다. 낮에는 교육자로서, 밤에는 글쟁이로서 열정을 쏟았다. ‘그 교장에 그 학교’라는 격언이 내 가슴속에 명지明志를 세우게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도 스승 상만은 버릴 수 없다.’, ‘교사와 학생을 움직이자면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나의 학교에서 잉태되어 가고 있다.’는 삼불망三不忘의 교육철학이었다.

첩첩 산중에는 소재가 많아서 <개구리 소리>, <행복한 유배>, <세월의 그림자> 등 꽤 많은 작품을 건졌다.

그 무렵 평민출판사에서 수필집 《한잔 차에 잠긴 세월》을 펴내면서 김병규, 송규호, 서정범, 박연구, 원종린과 함께 나의 작품도 끼워줘서 기뻤다. 곧이어 사조사출판사에서 《조그만 가슴으로 큰 행복을》,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를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문단의 저명작가인 이효석, 윤오영, 이상, 노천명, 조지훈, 김소운, 피천득, 한흑구, 천경자, 김태길의 틈새에 나의 작품도 넣어줬다.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 남몰래 혼자서 감격했다.

78년 9월 교육장으로 기용되어 경북의 오지 영양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거룩한 본능>, <화전민의 한 소녀>, <행곡령을 넘어오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