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⑬ |

 

정재은 편

 

 

                                                                    - 해설 : 유혜자

정재은(鄭在恩, 본명 鄭寅淑 1937~1996)님을 생각하면 스란치마 입은 정경부인이 연상된다. 고향 충주에서 종갓집 8남매의 맏이와 혼인, 한여름에도 한복 차림으로 시부모님께 불을 때서 지은 조석으로 시중들며 극진히 모셨다. 마당에서 일하는 자부를 보고 “마당에 환히 꽃이 피었구나.” 하고 기뻐하셨다는 시아버님의 며느리뿐만 아니라, 노동부차관을 지낸 남편(이용준)의 현숙한 부인으로 한복을 즐겨 입었다.

고달픈 살림 틈틈이 묻혀 있던 자아를 찾아 문재文才를 검증해 본 것은 1960년도로, 《여원女苑》 신인문학상 소설부문에 <방천둑 사람들>이 당선되었다. 상경 후 결혼 10여 년 만에 주부클럽 주최 백일장(1970년)에서 수필 <오월의 밥상>의 입상을 계기로 열심히 쓴 수필을 여러 잡지에 기고했다. 내가 처음 대한 작품은 추천받기 전 1972년 《수필문학》 9월호에 기고寄稿했던 <특별진찰권>이었다. 신경성 위장병 악화로 어느 대학부속병원에서 특별진찰권을 끊었는데, 극히 짧은 시간의 ‘특진’을 받고 나오면서, 특별히 보아준다는 것이 ‘특진’이 아니고 ‘특별히 빨리 진찰해준다.’는 의미인 모양이라는 재치 있는 고발적인 내용이었다.

1976년 《수필문학》 2월호에 <보은 할머니>, <치마>로 초회 추천(피천득, 윤오영 심사)되었고, 그해 8월 <돌배의 꿈>, <예각銳角>을 심사 중이던 윤오영尹五榮 선생의 별세로 전숙희田淑禧 선생이 승계, 추천하여 이듬해 1977년 1월에 정식 수필가로 데뷔했다. 그 후 ‘내간체의 규방수필의 일인자’로 인정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작품 활동이 원활치 못해서 수필집 《돌배의 꿈》(관동출판사, 1980) 한 권만 남겨놓고 타계해서 안타깝다.

<특별진찰권>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줄 짐작했지만, ‘수필문우회’의 초창기 회원이면서도 자주 합평회에 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지병이 언제 악화될지 몰라 불안해하며 전통을 중시하는 대가족, 맏며느리로서의 애환을 더러는 털어놓기도 했다. 1990년도에 수필문학진흥회 제정의 ‘제8회 현대수필문학상’을 받았고, 1995년 여름 변해명, 반숙자 씨 등과 문협 해외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유럽여행을 무사히 다녀온 것을 지인들도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부음을 들어야 했다. 불면증으로 시달리기도 했던 그의 좌절과 고독이 아프게 다가온다.

1978년 《수필문학》 9월호의 특집 ‘한국현대수필 속續 30선’에 자신의 작품 <치마>와 졸작 <병풍 앞에서>가 함께 뽑혀서 기뻐했던 때가 떠오른다. 초회 <보은 할머니>와 함께 추천작인 <치마>(1976,《돌배의 꿈》에 수록)와, 수필집 출간 후 1984년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에 발표, 수필문우회 수필집 《멀리서 가까이서》(1984년 범양사출판부)에 수록된 <은반지>를 읽노라니, 부덕 있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치마

 

 

어느 날, 쑥색의 브라인드가 두껍게 드리워진 M제과의 창 앞 테이블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약속한 친구는 나타날 줄 몰랐다. 웬일일까. 무료하고 진력난 눈길은 천정을 훑기도 하고, 벽의 장식을 더듬기도 하고, 들고 나는 손님들의 모습을 쫓기도 한다. 그러다가 벽 밑쪽 부분에 한길 쪽으로 난 붙박이 투명 유리창이 눈에 띄었다. 높이 40센티에 가로 2미터쯤은 될까. 길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정강이 밑만 보인다. 그들은 위로 무한한 공간이 트여진 곳을 유영遊泳하고, 나는 좁은 건물 안에 갇혔는데도 꼭 그들이 유리상자 속에 갇혀, 가고 오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열대어가 꼬리치는 어항 속을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가 있다. 휘적휘적 남자의 바짓가랑이가 지나간다. 어린 아이의 종종걸음이 지나가고, 펄럭펄럭 나팔바지가 지나간다. 샌들 신은 맨다리도 지나가고, 슬리퍼 밖으로 에나멜이 별나게 반짝이는 발톱도 지나간다. 문득 어항 같은 유리 속이 백화난만한 듯 호화로워진다. 두 여인의 한복 치맛자락이 지나가는 것이다. 낯선 풍물이나 대한 것처럼 눈에 번쩍 뜨인다. 보라와 분홍이 섞인 치맛자락 끝이 팔랑 벽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끊임없이 오가는 많은 다리들 중에 여자의 다리가 월등히 많았는데, 한복 치맛자락은 이 두 여인뿐이었다.

희소가치 때문일까. 팔랑 벽 속으로 숨어든 치맛자락이 눈앞에 맴을 돈다.

잃어버리고도 무엇을 잃은지조차 허허허 하다가 우연히 잃은 것이 눈에 띄었을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향수도 같고 미련 같기도 한 것이 마음을 촉촉이 적셔온다.

먼 옛날의 조상 할머니들로부터 현세까지, 어쩌면 여자의 눈물, 여자의 기쁨 하고많은 숨은 이야기들이 모두 이 치맛자락 끝에 얼룩지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로, 치마폭을 낙하산처럼 펼치며 떨어진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남강 푸른 물에 꽃송이처럼 날려진 논개의 치마도 있고, 행주산성을 쌓던 호국의 치맛자락 이야기도 있다. 조정을 휘어잡던 민비의 남 스란치마가 있었고, 사리고 앉아 예술의 꽃을 피우던 신사임당의 치마가 있고, 삼족三族이 멸하게 된 망가亡家의 한 생명을 치마폭에 감추고 칼날 앞에서 오히려 서슬 푸르렀던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물동이 이고 찬송가 찔러 감추던 개화여성의 집념의 치마도 있었다. 안으로 한숨짓고 속 태우던 할머니들만 있었거니 하다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행동적이던 치마의 역사도 있었거니 하면, 절로 마음 든든해지니 반가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아녀자들의 잡다한 애환이 고운 때처럼 솔기마다 초초롬히 배어진 치맛자락이 정감을 가지고 마음에 다가서기도 한다.

오랜만의 정인情人을 부엌문 틈으로 도둑질해 반기던 수줍은 치마꼬리가 생각나는 것이다. 눈물 젖어 다 썩던 시집살이의 치맛자락이 있었고, 억만 시름 한숨을 쓸어 담던 청상靑裳의 백옥 같은 치마도 있었다. 이리 쓸어 덮고 저리 쓸어 덮던 종갓집 맏며느리의 슬기롭고 다사한 열두 폭 치마가 있었고, 물방앗간 뒤를 찾던 순이의 이슬 젖은 깡동치마도 있었다. 또 인당수의 풍우에 흩날리던 심청의 애절한 치마가 있고, 동헌 앞뜰에 널부러진 춘향의 절개 높은 치마도 있었다.

한때는 자식 자랑의 척도를 가늠하려 들던 돌풍 같은 치맛바람이 있었다. 남편의 능력을 자세하려는 허영의 치맛자락도 있고, 살기 어린 작두 위에 무녀의 주술呪術 담긴 치마가 있고, 젓가락 장단에 목이 쉬는 허무의 치맛자락도 있던 것이다. 도리짓고땡이 판돈을 쓸어 담으려는 탐욕의 치마가 있는가 하면, 외래품 감은 배 위에 떨쳐입은 범죄의 치마도 있었던 것이다. 치맛자락 수난의 장章이라고 할까. 부조리가 밀물모양 들고나던 세태의 피해의 장이라고나 할까. 이 무렵부터 여자들이 한복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기 시작한 듯싶으니 어쩌면 황혼의 장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서양의 스커트나 드레스 자락도, 그쪽 여자들의 치마임에 다름없을 것 같다. 우리의 그것처럼 서양여인들의 많은 이야기도 그 스커트 끝에 자욱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넓은 홀을 화려하게 휘돌아가는 무도회의 비단 드레스가 있는가 하면 수전지대水田地帶에서 생활을 엮는 올 성긴 스커트의 얘기도 들려진다. 공작새처럼 찬란한 귀족 영양의 오만한 스커트가 있는가 하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의지의 스커트가 있고, 화톳불가에 넘실대는 집시의 새빨간 스커트가 있는가 하면, 깔고 앉아 우는 테스의 검은빛 스커트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양상은 달라도 여인들 애환의 본질은 동서가 별다름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스커트나 드레스 자락에서, 안으로 감싸여 드는 은은한 향훈, 마음을 적셔오는 안온한 정겨움이 없고, 캉캉 자락처럼 훌훌 떨쳐버리고마는 경박함이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나의 아집 때문일까.

볼품에 있어서도 단 한 가지의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다채로울 수 있는 한복치마에 견줄 만한 의상이 달리 또 없을 것 같다. 치마 끝을 휘잡아 허리끈을 잘끈 동이면 날렵하고 간드러진 맵시뿐만 아니라 허리와 엉덩이 선의 윤곽이 그린 듯 아름다워진다. 물 찬 제비 같더라는 비유가 이 맵시에서 생겨난 게 아닌가 싶다. 허리끈을 풀어 치마 끝을 겨드랑이에 슬쩍 끼우면, 또 더할 수 없이 안존 다소곳하고 아담스런 모습이 된다. 겨드랑이에 꼈던 치맛자락마저 나려 치마폭을 있는 그대로 떨치고, 대청이나 고궁 뜰에 서면, 그 화사 찬란하고 우아하기란 눈부실 정도인 것이다. 살짝 돌아 슬쩍 치켜진 저고리 도련 밑으로 햇살처럼 활짝 펼쳐진 주름은 아래로 내려오며 굽이굽이 산자락처럼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여밈새 하나로 이렇게 색다르게 아름다워지는 양은 볼수록 조화스럽기까지 하다. 한없이 펼쳐지는 넓은 애정과, 틈 없이 휩쌀 수 있는 결곡한 매서움을 동시에 간직한 우리 여인네의 성정을 그대로 나타낸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내게는 정답고 그리운 치맛자락의 추억이 있다.

손주 손녀 코눈물 닦아내기에 맨날 꼬기작했던 할머니의 흰 푸새치맛자락이 그리운 것이다. 공연히 골이 나서 아침을 굶은 날, 도시락을 치마 끝에 감싸 쥐고 교실 유리창을 넘실거리던 할머니. 학교에 입학한 첫 해 겨울이었다. 교실 밖에서 서성이다 하학하는 나를 널름 업고는 한정된 치마폭을 자꾸 잡아당겨 나의 발을 감싸서 꼭꼭 쥐어 주시던 할머니. 이젠 뵈올 길 없어 더욱 그립기만 하다.

층층시하에 오남매를 거느리고, 항상 바쁘게 펄렁바람 일구던 어머니의 치마 끝이 눈에 선하다. 한 가지씩 장만하신 나의 혼수감을 어른 몰래 궤짝 속에 챙기시느라, 감추어 들여온 곳도 치마폭 속이었고, 낯선 청년에게 딸의 전정을 맡기고 신행길 떠나는 모습 보기가 너무 서운해서 두 눈을 꼬옥 싸누르고 계시던 것도 잔치 설비에 땟국 흐르던 어머니의 치맛자락이었다.

젖내 비릿한 어머니의 저고리 섶이 따스한 아랫목이었다면, 그 치맛자락엔 마구 구르며 떼쓰고 응석부리고 싶은 봄 잔디 같은 푸근함이 있었다.

내려다보니 내 다리엔 너털너털 나팔바지가 감겨 있다.

“옛날처럼 자식에게 자기의 전 인생을 거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저희들에게 제 인생이 있듯, 내게도 내 인생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모성애도 계산이 따른다는 현대의 어머니들.

과연 현대의 여자들이 치마를 벗어던진 건 여성(혹은 애정)의 상실일까.

약속 못 지키는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은반지

 

 

나의 왼손 무명지에는 세공이 예쁘게 된 얄폿한 은반지 한 개가 끼어져 있다. 고무장갑 끼는 일이 싫어서 설거지, 빨래 등 집안일을 거의 맨손으로 하는 편이다. 가뜩이나 못생긴 데다 몹시 거칠기까지 한 내 손에 이 은반지는 과분하도록 사치한 물건일 수밖에 없겠다. 고무장갑 끼기 싫어하는 만큼이나 반지니 목걸이니 하는 따위의 장식품을 몸에 걸치기 싫어하는 나이지만, 어쩌면 이 반지만은 평생 동안 꽤 자주 내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누리게 해 줄 것 같다.

처음으로 내 소유의 반지가 생긴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면 소재지의 장터 한가운데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붕을 해 덮은 크고 어둑신하고, 그래서 조금 무섬증을 일게 하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 옆에 은방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어린 손주 하나만 데리고 살며,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늘 또닥또닥 은반지를 만들고 있었다. 도톰한 복숭아 모양의 한가운데에다 빨간색, 파란색으로 태극 모양을 꼭 박은 어린애들 반지가 제일 예뻤었다. 내 또래의 여아들 사이에서는 이 반지를 지닌 것이 대단한 자랑이어서, 시새워 부모님을 졸라 사서 끼고는 야시랑을 떨기도 했다. 여의치 못해 얻어 끼지 못한 아이들은 샘을 내며 입을 삐죽이기도 하고 더러는 우는 아이도 있었다. 할머니께서 사 주신 이 반지를 나는 저고리 고름에 끼워 매어서 앞에 차고 다녔다. 반지가 닳거나 빨갛고 파란 색이 더러 떨어져 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아끼느라고 그리 했었다.

다음으로 내 반지를 끼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재학생들이 졸업 선물로 충주여중 배지 모양을 한 은반지를 만들어 졸업생들에게 한 개씩 끼워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 직후의 가난 속에서 만들어진 이 반지는 너무 얇고 가늘어 그냥 끼고만 있어도 모양이 이리저리 일그러지더니 채 일 년도 못 넘기고 부러지면서 못 쓰게 되었다. 손이 조이는 듯 거북해서 반지 끼는 일이 반갑지 않았던 나는 이 못 쓰게 된 반지를 별로 서운해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는 약혼반지, 결혼반지를 갖게 되었다. 반지말고도 팔찌니 목걸이니 하는 것들이 꽤 딸려 왔었다. 본래 게으른 탓인지 그것도 천성인지 나는 여전히 이것들을 몸에 걸치는 일이 달갑지 아니했다. 무슨 모임이 있을 때 권에 못 이겨 몇 가지 걸치고 나갔다 돌아오면 옷도 벗기 전 서둘러 이것들부터 풀어서 경대 서랍에 넣어 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마치 사슬에서 풀려난 것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하였다.

“여자가 너무 무신경해도 매력 없는 법이야.”

하고 타박하던 남편도 시간이 흐르자 꾸밈새가 아름다운 친구 부인들 틈에서 아무 치장 없이 초라한 나를 천성이 그렇거니 흘려 보아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덧 나의 차림새에 아주 관심이 없어져서 무슨 기념일이나 내 생일이 돌아와도 실반지 한 개 사다 주는 법 없이 되어 버렸다. 몸치장할 줄은 몰라도 샘은 있었던지 나는 내가 자초한 이 무관심을 조금 서운해하였다.

내 나이 30대 후반쯤, 나는 어쩔 수 없이 반지를 자주 끼고 있어야 했다. 막내딸 아이가 열심히 반지를 사 나르는 것이었다. 소풍 갈 때 준 돈, 용돈으로 준 돈을 빈줄러서 사 오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 엄마는 다 반지를 껴서 손이 예쁜데 엄마만 반지가 없어 손이 미워 보인다는 게 반지를 사 나르는 이유였다. 반지를 사는 곳은 거의가 등하굣길에 있는 육교 위의 노점이었다. 일이백 원을 주고 사 오는 이 반지는 얇은 양철에 금물을 입히고 조잡한 모양으로 어린애들 눈 홀리기에나 좋을 듯이 만들어져 있어, 끼고 있으면 옆 손가락을 꼭꼭 찌르기도 했다. 일하는 데 성가셔서 빼놓으면 막내는 눈 끝이 샐쭉해지며,

“엄마, 내가 사 준 반지 왜 빼 버렸어?” 하고 싫은 내색을 지었다. 막내의 눈에는 다른 애들 엄마가 낀 귀금속 반지와 육교 위 노점에서 산 반지 사이에 어떤 차이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경대에는 실반지, 노란 알 박힌 것, 파란 알 박힌 것, 납작하게 조각한 것 등 여러 개의 반지가 굴러다녔고, 나는 손가락에까지 벌겋게 녹물이 묻는 반지를 끼고도 거침없이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였다. 막내 아이의 철없는 정성이 반지를 타고 나의 심장 속에 사랑으로 녹아들어 체면치레 중히 여기는 어른의 허영벽마저 스러지게 했나 보다. 나는 내 경대 서랍에 한 개 한 개 모여지는 이 반지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반기게 되었다. 그러나 막내가 조금 자라면서 어느 사이엔가 육교 위에서 산 반지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신나게 반지를 사 나르던 버릇도 뚝 그치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허전하고 서운하였는지 막내는 눈치도 채지 못했을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작은 소포와 함께 이런 편지를 받았다.

“언니, 금년이 언니 오빠의 은혼의 해로군요. 축하합니다. 덩둘한 오빠가 고작 외식이나 한 번 시켜 드릴까, 반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실 것 같아 주제넘은 선물을 보냅니다. 혹 오빠께서도 사 주시거든 양손에 하나씩 끼고 다니세요….”

아들 하나만 데리고 조촐히 살아가는 나의 시누이. 복스러운 용모, 덕성스러운 마음씨. 누구의 작희로 그다지 외로운 영혼의 별을 타고나게 되었을까. 자신은 영원히 끼어 볼 수 없게 된 은혼의 반지. 오빠 올케의 은혼의 반지를 고르며 어지럽기만 했을 시누이의 심사를 내가 어찌 갈피 잡아 짐작해낼 수 있으랴.

세공이 예쁘고 얄폿한 은반지를 손가락에 끼며 나는 너그럽지만도, 온화하지만도 못했을 나의 젊은 날을 몹시 민망해한다. 두서넛의 시누이 시동생들을 데리고도 속상해 못살겠다고 푸념하는 친구들을 더러 본 적이 있다. 일곱 명의 시누이 시동생들을 거느리고도 그들 때문에 크게 속 썩어 본 적이 없는 내게 과남한 인복人福에 감사할 줄 알라고 일러 주듯 이 글을 쓰는 전깃불 밑에서 반지는 더욱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