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憂愁

 

 

                                                                                      이태동

의식의 눈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환하게 웃는 얼굴과는 달리 우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수에 찬 모습에 미를 발견하면서 보이지 않게 마음이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 참된 우수는 갑작스럽게 의식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결한 흰 깃발의 미국 여류 시인 에밀리 딕킨슨은 “나는 고뇌하는 모습을 사랑한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키츠 역시 “미는 진실”이고, 미의 극점은 죽음이기 때문에 “우수는 미, 죽어야만 하는 미와 함께 산다.”고 했다. 햇살이 비끼는 가을날 이별의 아픔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우수에 차 테라스 창가에 앉아 있는 여인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녀에게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유난히 우수에 찬 얼굴에서 막연히 그리움과도 같은 동정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은 아픔에 대한 굴복을 의미함과 동시에 타인의 도움을 구하고자하는 외침이겠지만, 우수에 찬 모습은 극복하기 어려운 어두운 그림자와 싸우면서 느끼는 아름다운 삶의 아픔을 견디려는 침묵 속의 언어를 담고 있기 때문일까.

어떻게 생각하면, 밤안개 짙은 외로운 거리에 서 있는 가로 등불이 우수에 차 있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죽음과도 같은 어둠의 힘에 저항하며, 남다른 견인력으로 고독과 싸워 이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을 풍경이 우수에 가득 차 있는 것도 한여름에 무성하던 모든 생명들이 죽음과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아름다운 생명들이 시간 속에서 불꽃처럼 산화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까. 《허조그》라는 미국 소설의 주인공인 퇴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름다운 미인이었던 어머니가 임종의 침상에서 보여주셨던 슬픈 눈빛과 우수에 찬 표정은… 행복과 죽음에 대한 반영”이었다… “그 인간적인 우울, 검은 피부, 인간이 된 운명에 순종하는 굳어진 주름살, 눈부신 얼굴은 어머니의 섬세하고 고운 마음이 슬픔과 죽음으로 가득 찬 위대한 인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무감각한 사람들은 우수에 찬 모습을 무심히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의식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 슬픈 표정을 가진 사람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견디기 어려운 내면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우수에 찬 얼굴에서 극복할 수 없는 어떤 대상對象과 내면적인 갈등을 하고, 거기에서 오는 역설적인 기쁨마저 느끼고 있다는 미학마저 발견한다. 디킨슨의 <비끼는 햇살>은 이러한 삶의 진실을 탁월한 은유로서 나타내고 있다.

겨울날 오후의

비끼는 햇살─

무겁게 누른다

대 사원寺院의 풍금 소리같이.

그것은 우리에게 거룩한 아픔이다.

상처는 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은 다르다

그것의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아무도 그것을 가르칠 순 없다, 아무도.

그것은 비밀스런 절망?

하늘에서 우리에게 보내 온

장엄한 고통.

그것이 나타나면 풍경은 귀 기울이고─

그림자들도 숨죽인다.

그것이 가버리면, 죽음의 표정에

어리는 거리만큼 아득하다.

이 우수에 찬 시편은 겨울날 오후의 ‘비끼는 햇살’을 보고 잃어버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잃어버린 사랑과 같은 ‘비끼는 햇살’은 사원寺院의 풍금소리처럼 그녀의 마음을 우울하게 억누른다. 비록 이 시가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사원의 풍금 소리로 짙은 우수를 나타내고 있지만, 그것은 경건한 감미로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 풍금소리는 그녀에게 아픔을 주지만 ‘거룩한’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주지만, 또한 사랑의 상실이 의미 하는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화자는 헤럴드 블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비끼는 햇살’이 ‘환희’에 가까운 ‘비밀스런 절망’과 ‘장엄한 고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삶이나 사랑의 현상처럼 찾아오고 사라지는 ‘햇살’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보인다. 그에게 고통을 주고 사라지는 ‘햇살’이 존재론적인 빛이든, 혹은 에로스를 상징하든, 기울어진 햇살의 풍경 때문에 우울함에 젖어 있다. 그러나 그 우울함 속에는 침묵으로 말하는 변증법적인 숭고함이 잉태되어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남다른 견인력에서 느끼는 미학적 경험을 우수가 깃든 언어 속에 담은 것은 우리의 시의 경우에도 없지 않다. 유치환의 <바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슬픔이지만 이것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대부분의 우리는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지만 우수에 찬 눈매를 가진 얼굴만큼 인간의 깊은 고뇌와 의지를 함께 담은 표정도 없다. 그늘진 우수에 찬 얼굴은 철학적이라고 할 만큼 내면적으로 어두운 힘과 싸우면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며 탐색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표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철학자의 파안대소破顔大笑도 내면적인 고뇌를 해결 한 후에 나타나듯이 환한 웃음도 우수에 찼던 얼굴에서 피어날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그래서 우수에 찬 표정은 어둡지만, 가벼운 웃음보다 더욱 깊은 인상을 우리들 마음에 남기고 스쳐간다. 우수에 찬 얼굴은 고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인간적인 시련과 싸우는 진실을 나타내는 ‘흐리고 애처로운 거울’이다. 내가 어느 누구의 우수에 찬 얼굴의 눈망울에 이끌리는 것은 그것이 내게 무엇을 호소하기보다 내 마음의 진실을 비쳐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