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김용옥

또 하루를 살아갈 일이 두려워 본 적이 있습니까?

또 하루를 살아갈 일이 지겨워 본 적이 있습니까?

젊음의 혈기로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인간 절벽의 암담함 앞에서 자신을 망실한 채 우두망찰, 해 돋는 아침마다 밝는 해가 두려워 방구석지에 웅크리던 날이 다시 서럽습니다. 절망과 투쟁할 힘도 없을 만큼 늙으면 마음도 늙어서 더 이상 괴로울 것도 비참할 것도 없을 텐데, 젊어선 지식으로도 상식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삶을 사는 일은 비참한 절망. 또 하루를 살아갈 일이 막막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역사는 방정식으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삼각함수나 로그로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도 인생의 원리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몸을 찻잎 삼아 구증구포를 한다 해도 차맛이 날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다. 살면서 절감한 것은, 인간은 결국 ‘저 혼자’라는 것. 말로 소통하고 사랑하고 역사役事할지라도 각자가 각자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어머니도, 나의 막무가내 사랑이자 무작정 사랑인 딸도 ‘혼자’로 분리된 존재. 인간은 절대고독의 존재다.

지금 나는 내 이름과 어머니로 살고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삶은 필시 내림이다. 삶도 유전적 DNA를 가지는 게 분명하다. 인생이 고해라 한 말도 사실이다. 단지 목숨이 있으니 감사히 건너야 하고 건널 수 있는 고해다. 험난한 시련을 헤칠 때면 태어난 목숨이 원망스런 적이 있을 테지만 부디 생명과 세상을 주신 ‘어머니’께는 어떤 섭섭한 말도 모진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의 감성으로 팔팔하던 이십대를 통과하고, 시시콜콜한 일도 인생의 멋진 경험처럼 장황하게 조잘대는 삼십대를 지나면서 역사와 종교, 철학에 미쳐서 살았다. 배워 알기를 포기한 자는 인생을 포기한 자라고 생각했으니까. 잡동사니를 읽어 얻는 것들은 실생활에 엄청난 난기류였다. 그걸 인식하고 삭이면서 사생결단하듯 사십대를 건너는 동안에 사교邪敎나 미신未信에서도, 되나깨나 사는 것 같은 인생에서도 스승을 보았다. 처처에 스승이 있었다. 그리고 지천명의 오십대. 나는 종교심으로 운명을 이해하고 인생이 무엇인가 깊이 통찰하며 비로소 자연과 인간에게서 존귀한 신성을 깨달았다.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가 있기에 생명체는 존속된다. 어머니란 시련에 강하다. 어머니는 어떤 고난에도 인간적이다. 왕년에 팥 닷 섬을 진 장사일지라도 한 송이 자식꽃을 위해 평생을 엎드려 지심이나 매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인생에 긍정적이다. 어머니는 모든 자손에게 생명과 세상과 인생을 주는 존재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받은 나의 인생이 회오리치듯 죽을 동 살 동 흘러갔다.

흘러간 과거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멋진 미래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속아 살 필요도 없다. 과거와 현실을 확실하게 직시하며 미래를 점칠 만도 한 나이가 지천명이다.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엔간히 손에 쥐고 살았다. 빈손으로 돌아갈 때가 머지않건만 아직도 쓰잘데기 없는 세상것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할 말 쓸 말이 태산 같은 줄 알지만 사실은 유구무언이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내 인생이라고 기를 쓰며 살았지만, 내 인생이란 게 별로 없다. 얽히고설키며 휘둘리는 줄도 모르고 잘난 체하며 잘 사는 척 살았다. 속되고 유치한 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른 셈이다. 사람살이란 매양 어리석은 것이다.

철부지시절엔 뭐가 뭔지 모르고 온갖 것에 현혹되어 뒤적거리고 살지만 인생이 뭔가를 스스로 발견하면 철든 거라고 한다. 철든다는 것! 서른이면 철들까, 쉰 살이면 철들까 했지만 어림없다. 우리 어머니는나이 일흔이면 철나는 줄 알았더니 희수가 되고서야 인생에 철이 좀 들더라고 하셨다. 혹 신부나 스님은 완전히 철든 인간일까? 또는 학자나 예술가가, 자기가 세운 관념과 선택한 길에 매진하여서 소위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면 그게 철든 인생이란 뜻일까? 아니면 수천수만의 사람에게 생활비를 벌게 해주는 대기업가가 철든 인간일까? 존경하지만 모두 직업인-참 잘하는 일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누구라도 진실로 공간의 존재인 만상과 시간 앞에 겸허할 때 철이 드는 게 아닐까. 철들기가 얼마나 지난하기에, 오죽하면 인생에 철들 만하면 이미 죽을 때라고 했을까.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철든 존재, 곧 위대하다고 흠모되고 숭앙되는 현자일지라도 그들이 내게 생명과 세상을 주진 않았다. 내가 진정 자유의지의 인간, 자유사상의 인간이 되는 데에 소위 성현의 지혜가 지대한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천지간에 눈부처 아닌 것이 없지 않은가.

내일을 아지 못하고 살던 젊은 날, 상한 갈대처럼 꺾인 나의 미래는 희망이라기보다 공포였다. 나는 물기 한 톨 없는 자갈밭에 던져진 꽃씨이거나 늦가을 들판에 뿌려진 볍씨 같았다. 도대체 어째서 이러는가. 내 인생이 억울하고 서럽다 못해 시시껄렁한 죄까지 뒤적거리며 제단 앞에 꿇어 엎어져 통곡하고 애원하고 간구할 때 그때, 어느 신이 나를 위해 가엾이 여기며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었던가. 시퍼런 의식과 지성을 가지고 미칠 수도 없고 자기최면에 걸릴 수도 없어 삶의 기력과 넋조차 잃어갈 때 그때, 진실로, 나를 외면하지 않고 오, 불쌍히 여기며 피투성이 가슴에 두 손을 모아준 이는 오직 내 어머니의 가슴 절여지고 애 끊어지는 간절한 음성이었다. “딸아, 일어서라, 내 딸아!” 어머니는 몇 번이나 죽음에서 내 목숨과 인생을 건져주셨다.

역사상 위대한 성현으로 기록된 어떤 사람도 모두 한때는 어머니의 어린 아기였다. 다만 그들은 인간과 인생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 어떤 시대에도 인생은 요지경. 사람과 세상을 탐구하며, 내일은 어제와 다르리라고, 달라야 한다고, 오늘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머나먼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앞서 걸은, 인생에 철든 철인哲人이 석가모니요 소크라테스다. 그들은 각자의 어머니가 준 생명과 세상을 가지고 재미나게 살다 간 천재들이다. 그들은 범속에 안주하지 않고 인생에 열정으로 달려들어 탐구하여 각성했으므로 현철賢哲이 되었다.

누구나 문학소년기를 지나지만 아무나 문인이 되지는 못한다. 더더구나 누구나 인생이 뭔가를 묻지만 끈질기게 자문하여 철드는 성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길래 소위 선각자의 인생관을 배우며 닮아 보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성자의 말을 닮아 입으로 주워섬겨도 성자의 인생을 닮는 사람을 못 보았다. 보통사람만 널려 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속성이 곧 성자의 정신임을 통감했다. 툭하면 성자상聖者像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간구하던 나는 제일먼저 어머니께 속죄했다. 그게 내 깨달음의 시초였다. 거듭남이고 거듭 삶이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간의 고요함, 생명의 먼 물소리, 세상빛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발견할 때 그때, 인간은 인간이 만든 덫 혹은 굴레를 좌악 찢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인생은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곳엔 참된 정신과 신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인생의 고요함, 생명의 먼 물소리, 세상빛을 내게 주셨다. 온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다.

어머니는 진정 모든 사람의 사람신神이다.

 

 

1988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 《生놀이》, 《틈》,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생각 한 잔 드시지요》 외.

시집 :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유는》, 《세상엔 용서해야 할 것이 많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