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걸이

 

 

                                                                                 김명규

정일 나사. 자음과 모음이 반씩 지워진 글씨가 남아있는 옷걸이다. 세탁소에서 가져온 남편의 양복을 걸기 위해 옷장을 여니 아주 오래된 그 옷걸이가 손에 잡혔다. 삼십여 년 전 일이 바람처럼 날아와 내 이마를 쳐든다. 당시 새 양복에 딸려 왔던 옷걸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견고하고 튼실하다.

남편이 J읍의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학부형들의 선물이라며 가끔씩 암탉 한 마리를 보듬고 올 때도 있었고, 고소한 냄새가 펄펄 풍기는 참기름을 한 병씩 들고 올 때도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 올 무렵 지푸라기로 길게 엮어 만든 둥근 집 안에 뾰족이 숨은 계란한 줄씩 들고 올라치면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깃흘깃 쳐다보더라고 하였다. 어느 학부형은 퇴근하기 전 일찍 교무실로 찾아와 남편의 책상다리에 닭 한 마리를 새끼줄로 묶어놓고 가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보면 묽은 닭똥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어서 그걸 치우느라 혼났다고 남편은 말했다. 또 봄, 가을에 소풍을 다녀오던 날이면 학생들이 하나씩 건네준 삶은 계란과 단감 몇 개와 사탕 몇 개는 우리 식구들의 심심찮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남편이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온 작은 선물에 살림하는 나는 쏠쏠한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뇌물인지 모른다며 얻어먹는 것 좋아하지 말라고 하였다.

정일 나사는 읍내 번화가에 자리했던 양복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담임하던 남편의 학급에 이재용이라는 그 양복점 주인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재용이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다. 학과 담임선생님마다 그 아이를 교무실로 불러 벌을 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급우의 도시락을 몰래 훔쳐 먹고 빈 도시락에 돌멩이를 넣어놓기도 하고, 앞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받고 있는 급우의 등을 간질이며 방해를 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 벽에다 온갖 낙서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녀석이라고 학생들은 단정지었단다. 남편은 그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라며 출근하는 일조차 심란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울타리에 손을 벌리며 뻗은 연한 호박잎을 따서 약찬 풋고추 두어 개를 썰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에 지친 남편은 늘 허기져서 해거름 때에야 돌아왔다. 그날 그는 큰 상자 하나를 들고 오더니 방바닥에 부렸다. 정일 나사라고 쓴 상자 안에는 새 양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다. 내가 그것을 펼쳐보며 웬 양복이냐고 물었지만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장롱 안에 걸어둔 밝은 감색의 그 추동복을 남편은 늦가을 쌀쌀한 날씨에도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 양복이라 따뜻할 테니 입어 보라고 여러 차례 권했지만 그 양복을 도로 갖다 주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였다. 재용이의 국어점수가 학급 최고 점수를 받은 수석 학생과 동점이 나왔다고 한다. 1등 학생의 뒷자리에 자리를 바꿔 앉아 커닝을 한 것이었다. 남편은 할 수 없이 학부형을 소환하였다. 그날 재용이 아버지는 남편을 보자마자 조용히 숙직실로 가자고 하였다. 교무실에서 상담을 하기가 창피해서 그러려니 싶어 남편은 그곳으로 앞장을 섰다. 그랬더니 숙직실로 들어서자마자 준비해 온 줄자를 남편의 가슴에 둘러대더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치수를 적어 갔다는 것이다. 남편은 한사코 거절하면서 제발 재용이 교육에나 관심을 갖고 협조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거다.

남편이 교육 현장에 있을 적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은 재미있는 일들도 있었지만 씁쓸하고 슬픈 일들도 많았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도시락을 못 가져 왔던 제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며, 밥술이나 먹던 집 아이들이 학교 규율을 어기며 일어나는 문제들도 다양했다. 등교하는 날보다 결석일수가 더 많은 한 학생의 어머니가 담임선생을 찾아왔다. 그 어머니의 말이,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아야 나중에 선생질이라도 해먹고 살 텐데 걱정이라고 도리어 담임의 지도가 소홀한 양 떠넘기더라고 하였다.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하고 돌아왔던 남편은 그 말을 되새기며 슬퍼진다고 말하였다. 학창 시절 착실히 수석을 놓지 못했던 죄로 자신은 교사가 되었다 늘 푸념하던 남편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나니 기가 막혔을 것이다.

은희경의 소설 《새》에 등장하는 고창읍내의 거리 속에 나옴직한 정일 나사가 선연히 떠오른다. 학부형의 말마따나 힘없고 말단인 평교사의 아내로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때로는 그 좋은 머리로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에 도전해보지 그랬느냐며 남편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교 십 등 안에 들었던 남편의 친구는 부장판사를 지냈고, 이십 등을 오갔던 친구는 도지사를 거쳐 정계에서 한때 이름을 날렸다.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던 남편을, 내 속 좁은 야망의 도구로 담금질하였던 지난날들도 이제 저물어간다.

열 번도 더 변하는 것이 사람인지라 재용이는 큰 사업가가 되었고,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연로하신 은사들을 찾아뵙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단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 모르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나는 감히 명언이라고 믿고 싶다. 요즘 젊은 부모들이 오로지 자식의 성적 올리는 데에 목숨 거는 모습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다.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도 답답하고 듣기 싫을 뿐이다. 외국이 아니라 별 곳을 보내든 보내지 않든,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이는 공부하고, 달달 볶아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는 하지 않는다.

세월은 사람을 성정대로 만들고, 제 격에 맞는 인생을 걸 옷걸이는 각자에게 다 있지 않을까. 다만 그 옷걸이에 어떠한 것을 걸어 장식하였는지에 노력과 능력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복이 있어야 산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다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