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이동렬

우리는 아무도 신생아에게 웃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인종·문화를 막론하고 신생아는 생후 2달에서 4달이 되면 웃기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거나 농아, 혹은 신체 발육이 완전하지 못한 신생아도 마찬가지다.

웃음을 연구하기 위해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 캐나다 몬트리얼의 언론인 네렌버그(Nerenberg)라는 사람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웃는다.”고 한다. 신생아는 말言語을 시작하기 전부터 웃는다. 동물들도 웃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과연 그럴까 의심이 간다. 웃음을 기본 언어라고 보면 언어가 일차적인 통신 수단이 되고 웃음은 그 부속물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은 틀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웃음은 근본적으로 놀이와 교제의 언어이다. 저명한 신경의학자 프로봐인(Provine)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서양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의 90%는 충분히 웃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예식, 이를테면 장례식이나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웃지 않고, 스트레스에 쌓여 있거나 우울한 소식을 들을 때에도 우리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진다.

웃음에는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업신여기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을 때가 많다. 링 위에서 펀치를 주고받던 권투 선수가 상대 선수가 날린 강펀치를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허세는 “아이고 간지러워라, 이 애송이야. 이 정도 펀치를 가진 하룻강아지가 나한테 덤벼들다니…. 여기가 어디 간질이기 시합 장소인줄 아나봐!”하고 상대를 비웃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상대방을 얕잡아 본다는 메시지를 보낼 때도 웃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사랑의 메시지를 보낼 때도 웃으니, 웃음의 기능도 우리의 사회생활만큼이나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웃음이 헤픈 사람, 특히 사내 녀석이 웃음이 많으면 줏대가 꿋꿋치 못하고 마음씨는 좋으나 매사에 흐리멍텅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 한편 여자가 웃음이 많으면 그녀의 정조관념에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사람들이 하루에 웃는 시간이 평균 5분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것을 3배인 15분 정도로 늘이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적어도 2배는 올라갈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기분이 좋아서 웃기도 하지만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웃음에 관한 시를 쓴 것이 몇 개나 될까 하는 호기심으로 김희보님의 책 《한국의 명시》를 훑어보았다. 여명기부터 현대까지 180여 명의 시인 가운데 제목에 웃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는 단 한 편, 즉 파인巴人 김동환의 <웃은 죄>밖에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종 음악사에서 펴낸 《동요 1200 곡집》에는 웃음에 관한 노래가 4곡이나 있었다. 그 중 박경용 요謠 정혜옥 곡은 이렇다.

웃으면서 떠 오는 아침 해처럼

우리들도 하하하 웃으며 살자

새 나라의 어린이 모두모두 웃으면

삼천리는 하하하 웃음꽃 피네.

웃음 얘기가 나오면 저 유명한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 시구를 빼놓을 수 없다.

있으나 없으나 즐거이 살자

웃지 않고 사는 이 바보 아닌가

(隨富隨貧具歡樂/ 不開口笑 是痴人)

물질적으로 넉넉하다고 더 많이 웃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예로 필리핀은 물질적으로 그다지 풍부하지는 못한 나라이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 중 행복감이 높고 국민들이 잘 웃는 나라가 아닌가.

웃음을 가져오는 것도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주위 사물을 해석하는 내 마음 하나에 달린 것. 세상이란 즐거운 마음으로 보면 한없이 기쁘고, 울적한 마음으로 보면 한없이 슬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