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부니

 

 

                                                                                      박상혜

조락의 계절, 바람이 분다. 황량한 가을바람이 부니, 대기의 온기가 싹 가시며 산야가 알몸으로 드러난다. 스산한 바람이 한번 “휙~ ” 핥으면, 대지의 나신裸身들은 한 꺼풀 더 벗겨지는 아픔으로 서로 서걱대며 가을을 울고 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흐느낌이 들린다. 광활한 우주에 공명을 일으킨다. 맑은 계곡물은 정수리에 명징明澄으로 찰람대고, 벗은 산야는 우리의 영혼을 영기靈氣로 일깨운다. 완전한 비움의 계절, 알몸의 가을은 우리들 본체의 존재를 선禪하게 한다.

문득 어느 강좌에서 들은 선문답이 생각난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樹凋葉落時 如何?) ”

선사가 답했다.

“ 가을바람에 몸통(본질)이 드러나니라.(體露金楓.) ”

비우는 계절에서 가을의 알몸을 통찰하고 본체의 존재를 깨달으라는 가을 禪의 메시지 같다.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에도 “만물이 지나치게 왕성해지면 다 말라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기에 무릇 가을은 형관이다.(夫秋, 刑官也, 物過盛而當殺.)” 라고 하지 않는가. 우주의 원리가 이렇듯, 가을은 냉혹하게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며 꿰뚫고 있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가 우리 내면의 본체를 직시한다 해도, 내 안의 존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선사들이나 참선자들은 집착과 미망을 버리고 아상의 관념을 벗으면 무아지경에서 볼 수 있다 한다. 하지만 우리 범인凡人들은 이 장애 요소인 ‘인식의 관념’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으니 빛나는 내 안의 존재를 어찌 볼 것인가. 불교에서도 이 캄캄한 복합 관념의 한계를 ‘無明’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우리 ‘인식관념’의 선글라스부터 벗어던져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점인 것을 어쩌랴.

젊은 날, 청순한 사랑을 경험했다. 빛나는 연인을 만나 사랑의 날개를 달고 그에게로 날아갔다. 우리들의 사랑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도라지꽃처럼 청아했다. 고아한 도라지꽃을 피우기 위해 그는 아침 이슬이 되고 나는 밤 도라지가 되어 그를 기다렸다. 청순한 사랑은 우리들의 청춘을 찬란한 무지개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바람에 목을 매는 그림자놀이 인생들. 우리 사랑에도 질투의 복병이 있어, 도라지꽃은 벼랑에서 꺾여 낙화되었다. 연인은 상처를 위해 외국으로, 나는 낙엽으로 허무의 늪에 빠졌다. 그렇게 청아한 도라지꽃 사랑은 한낱 이슬로 스러졌다.

내리막길 인생에서야 낙엽 인생도 철이 든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닌 바람에서 ‘바람 인생’을 터득하는데 인생이 다 기울었다. 지난날 사랑의 사금파리 아픔도, 가슴의 공동空洞의 통증도 다 바람이 털고 지나갔다. 이제 바람의 공허까지 껴안은 빈자리엔 새살이 돋아 아물었다.

저무는 인생, 사랑의 그림자조차 스러졌는데 또 낙엽 인생의 심판이 다가서다니,

“몸과 마음이 무너진 자리에 오롯이 진실만 남는다.(心身脫落盡 惟)” 라고 했다. 젊은 날의 사랑의 아픔과 열정도 다 고엽이 되었고, 몸과 마음도 쇠잔해 내리막길 인생인데 본체의 진실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이 가을, 형관의 철퇴가 나의 과녁 어디쯤은 제법 맞춘 것 같다. 진실은 못 본다 해도, 가을 누드 속에서 존재의 가벼움은 알 듯하다. 우선, 몸과 마음을 간절히 비우고 싶다. 비록 내 안에 본체, 그 진실은 보지 못한다 해도 그 실상을 느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진실을 꿈꾸며 살고 싶다. 알몸의 존재를 자각해야 하는 이 형벌의 계절에…… .

인생은 세상에 꽃 피우려 왔다 하지 않는가. 이제, 낙엽 인생으로 가을의 심판을 받았다면, 그 밑거름으로 나의 꽃을 피워 보고 싶다. 이번엔, 내 안의 존재, 그 영혼의 이슬을 머금은 청량한 도라지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