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흰 깃발이다. 옆에선 파란 천막이 공중에서 노닌다. 시선을 낮추니 바닥에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가만 다가간다. 발목 물 찰랑대는 물결 소리가 전해질까 조심스럽다. 드디어 그의 자태가 드러난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길 위에 자신의 안방인 양 드러누운 남자.

깊은 잠이었다. 분명히 여러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을 터인데 아무런 기척이 없다. 파도와 갈매기의 울렁거림이 자장가로 들리는가 보다. 그가 드러누운 바닥은 굴을 캐고 난 빈 껍데기가 닥지닥지 붙은 돌무더기이다. 편평한 갯벌이 하고많은데 왜 하필 딱딱하고 까슬까슬한 돌 위란 말인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밀물의 의식도 없이 그는 누워 있다.

바닷가를 둘러본다. 드넓은 갯벌 위에선 관광객이 조개를 잡느라 한창이다. 저들도 나처럼 휴가지로 섬을 선택한 사람들일 게다. 장고도는 인적이 드문 개발이 덜 된 곳이다. 책자나 인터넷에서 섬의 정보를 찾아본 이라면 알고도 남으리라. 섬에 오려면 한 달 전에 예약을 마쳐야 하고, 변변한 식당이 없어 식단표를 작성해 먹을거리를 챙겨야 한다.

무엇보다 한 시간 전에 항구에 닿으라는 말을 어기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허겁지겁 도착하여 표를 끊었으나 여객선엔 짐차를 실을 공간이 없다고 한다. 대가족을 동반한 우리도 어김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섬에 먼저 닿은 가족은 짐을 기다리며 배를 쫄쫄 곯아야 한다. 성미 급한 섬 손님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조개를 잡으러 바다로 내달린다.

갯벌은 금세 밭을 일군 듯 파헤쳐진다. 두서넛씩 바닥에 주저앉거나 허리를 구부려 조개를 잡는 일에 몰두한다. 호미와 삽으로 파헤친 갯벌은 마치 경작해놓은 대지 같다. 막내 제부가 허리를 펴다가 자신이 파놓은 갯벌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텃밭을 이렇게 일구면 농사는 분명히 대풍이겠지 생각한 모양이다.

인간의 욕심은 언제 어디서나 발동하는가 보다. 조개를 재미로 잡는다지만, 욕심은 허리조차 굳어가는 줄 모른다. 이카로스는 과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날개가 태양열에 녹는 줄도 몰랐다던가. 아픈 허리를 손으로 짚고 함지에 담긴 조개를 보며 내심 흐뭇해하지만, 굳어진 허리를 펴느라 밤새 조개 타령을 하리라.

휴가가 ‘휴식’이란 타이틀이라면, 나처럼 금세 조개잡이도 싫증이 나리라. 일상을 벗어나 섬으로 편안한 휴식을 취하러 온 것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생각지 않는다. 떠나온 목적보다는 탐심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사진 기사를 자청했지만 이내 무료해진다. 천천히 갯벌을 벗어난다. 큰 바위에 청송이 고슴도치처럼 생긴 섬 안에 섬, 명장섬이다. 모두 조개잡이에 여념이 없어서일까. 섬을 구경하는 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명상이라도 하듯 갯벌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건 갈매기 무리뿐이다. 저들은 바다가 심어 놓은 열매를 탐하는 인간군상을 그저 무념무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역광선인 바다는 은빛 물살로 찬란하다. 바다로 달려가는 검은 그림자는 부모의 조개잡이를 지켜보거나 함께 놀아달라고 보채다 지쳐버린 아이들일 것이다. 두 팔을 휘저으며 마치 새처럼 은빛 물살과 노닐고 있다.

명장섬을 휘돌아보고 갯벌로 돌아가는 길이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길 위에 홀로 잠든 남자를 발견하고야 섬에 온 의미를 깨닫는다. 바닷가에서의 진정한 휴식 자는 잠든 남자와 아이들이리라.

검버섯 핀 그의 얼굴은 평화롭다. 나비잠의 자태다. 그가 누운 바다는 양수의 또 다른 의미인가. 태초의 자리, 어머니의 자궁을 떠올리려는 건 아닐까. 태아가 모체에서 깊은 잠을 자듯 그는 지금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바다가 아닌 지상에서 최상의 안식처라고 그의 표정이 말하는 듯하다.

그가 무언의 깃발을 전한다. 백기가 그의 말을 대변하는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고. 내 안에서 무시로 꿈틀거리는 욕망, 질투, 분노, 고통으로부터의 항복이다.

저물어가는 해가 바다의 표정을 바꾼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던 은빛 물결이 이제 황금빛 물결이 되어 술렁거린다. 살갗에 스치는 바람 또한 서늘하다. 머지않아 밀물이 바로 밀려들리라. 숙소로 향하는 내 눈길과 발길이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직 거기 그대로다.

삶에 재충전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당신도 나도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에게 새롭게 태어날 시간이라고 텔레파시를 보낸다.

 

 

2004년 《월간문학》 등단.

2004년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수상.

저서 : 《검댕이》, 《망새》, 《버선코》 현재 (주)대원 관리이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