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길은 없다

 

 

                                                                                             김영인

공연히 마음이 허둥거리고 생각이 많아질 때가 있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나는 그동안 무얼 하였나 싶기도 하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그간 나에게 고마움으로 다가온 사람과 안타까움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그런 날이면 간단히 배낭을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선다. 주로 마을 뒷산이나 내가 사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날 무작정 걸으며 나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기회로 삼는다. 그러면 나름대로 삶의 방향과 색깔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작은 깨달음 하나 막연히 기대하며 길을 나서본다.

날씨는 완연한 여름이 아니건만 쏟아지는 햇살은 뜨겁고 눈부셨다. 창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과 팔에 햇볕 차단제를 연신 발라가며 도착한 곳은 해안산책로. 늘 바다를 곁에 두고 살지만 솔솔 불어오는 짭조름한 냄새에 알지 못할 향수가 울컥 치민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 위로 괭이갈매기 두어 마리 앉았다 점점이 흩어지고 해안선 따라 화사하게 조성된 산책로에는 초로의 부부가 잰걸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얼핏 보아도 마치 엄마 따라 산책 나온 병아리같이 그 모습이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것, 어쩜 우리 부부들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도 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보폭을 맞추어 그 부부 뒤를 멀찌감치 따라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에도 후줄근해지고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몸이 쩍쩍 달라붙으니 발걸음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이때 저만치서 그늘막이 보인다. 잠시 그곳에 앉아 땀을 닦으며 생수 한 모금으로 원기를 되찾는다. 문득, 꽃 같은 그대 나도 당신의 그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산책로를 빠져나와 동삼중리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왼쪽에는 사격장과 목장원이 오른쪽에는 아까시 휴게실이 황급히 달려 나와 반긴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지독히도 많이 다녔던 곳이다. 갓 헹군 목소리로 이슬노래 부르고 친구와 가위 바위 보 하며 아까시 잎사귀 하나씩 톡톡 떼며 우리는 수정보다 더 맑은 추억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해마다 아까시 꽃 필 때면 나는 원인 모를 그리움에 몸살 앓지만 묵묵히 흐르는 저 바다는 또 내게 말을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과거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세상 모든 것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고.

목장원과 휴게실에서 벗어나 곧장 올라가니 7.5광장이 나타난다. 이제 머잖은 곳에 내가 다녔던 여고의 팻말이 보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참 힘들었다.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생활력이 강하지 못하였고 쉰을 넘기고부터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식구는 많고 배는 자꾸 고프고. 밥보다 멀건 밀수제비를 더 많이 먹던 시절이었다. 아침을 굶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 일을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가난 속에서 나눔을 배웠으며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 순수와 진실이란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자박자박 추억 속을 걷던 나를 깨운 것은 왁자한 시장이었다. 나는 어느새 시장이 있는 동삼동 번화가를 지나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위로 가면 태종대, 아래로 가면 청학동이 나온다. 잠시 멈칫거리며 갈등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생도 선택이란 명제 앞에서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아니 때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내가 나아갈 방향마저 잃어버리게 되나 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제나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게 인생이란 것이다. 아스팔트같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곧고 편한 길도, 슬픔과 고난을 주는 울퉁불퉁 못난 길도 그 모두 깨달음을 주는 나의 소중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오늘 걸었던 산책로, 아까시 만발한 숲길, 낡은 세라교복이 넘나들던 7.5 광장에서 내가 만났던 초로의 부부가, 묵묵히 흘러가는 저 바다가 그리고 지독하게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은 오래도록 나에게 말할 것이다.

평탄한 길이든 울퉁불퉁 자갈길이든 그 어떠한 길도 말하지 않는 길은 없다. 길은 우리에게 무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만 우리 귀가 듣지 못하고 우리 가슴이 깨닫지 못할 뿐이라고.

 

 

부산 출생.

월간 《문학세계》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