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음악 1

 

 

                                                                                          김진자

어느 계절이건 비만 오면 집을 나서고 있다. 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봄비는 조용해서 좋고 여름비는 드세다. 가을에 내리는 잔비는 슬프고도 애잔한데 비해 겨울비는 푸르다. 그가 푸른 것은 곧 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집 뒤에 있는 개천을 따라 산책로를 걷거나 아니면 네거리 건너에 있는 중앙공원으로 가 여러 형태의 비를 만난다. 같은 구름 뭉치에서 생겨나는 물방울들이지만 떨어지는 모습들이 다 제각각이다. 누구는 가늘고 여린 몸매로 둥근 조경수 위의 꽃잎처럼 사뿐한 여인으로 오는 가하면, 어떤 우직한 녀석은 누각의 기와지붕 위에서 한 번 더 뛰어내리는 스릴을 즐기다 코가 깨지고, 덩치가 큰 다혈질의 녀석은 광장 대리석 바닥에 직선으로 꽂히면서 짧고 굵은 생이 되기도 한다.

빗줄기들의 가지가지 삶을 보면서 저들은 선택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선택이라면 한껏 멋있어야 한다. 낙수도 폼나고 멋스러울 것이며 고운 풀밭에 내리려면 우아한 기품도 지녀야 한다. 나는 이 시간을 선택했지만 다른 이들은 바지자락을 적셔가며 웬 주접이냐고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을 원했고 원한 만큼 양껏 즐기고 있다. 공원의 누각기둥에 어깨를 걸치고 그들의 행태行態에 흠뻑 빠져 있으니까.

작은 일상 중에 원하는 것이 있었다. 한 번쯤은 산과 함께 비를 흠뻑 맞아보고 싶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불가항력의 무기력에 빠지고 그 가운데서도 어떤 빛의 줄기를 찾고 싶다.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영육靈肉의 정화를 타의에 의존해 보고 싶은 인간의 나약함인 것이다.

눈이 오는 날 산행하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이미 쌓여진 설산雪山을 찾아 길을 나서기도 했고, 준비 없이 떠난 산행지에서 때 아니게 폭탄같이 쏟아지는 눈발을 만나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그 순간들을 즐기기도 했지만 우중의 등산 체험은 아쉽게도 없었다.

동네 산을 가려는데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을 챙겼다. 산 정상에 오르니 는개비로 시작하더니만 내려오는 길에서는 제법 굵어진 빗방울들이 낙엽을 두드리는 소리를 낸다. 소리는 다양했다. 늦여름 이후 비가 내리지 않아 바싹 마른 산이 첫 비를 맞느라 산 속은 흥겹고 카랑카랑하다. 대단한 인연이다.

오선지에서 시작하는 오페라의 한 음 한 음이, 자연의 물소리 바람소리를 건반 위로 옮겨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지금의 산 속은 가랑잎과 물방울들이 제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부르는 선율이다.

자연이 직접 들려주는 오페라는 각자의 개성을 흑백 건반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을 고스란히 담은 완벽한 화음이다. 어느 소리는 수선스럽다 못해 산만하기까지 해, 저 녀석은 성미깨나 급한 놈이라고 짐작해 본다. 저리 수선스런 꼴은 상수리 잎이던가 사촌지간인 굴참나무일 게다. 잎이 넓은 놈의 허풍섞인 소리가 틀림이 없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덩치가 크면 허풍 끼가 있어 울림이 허할 수 있다.

그렇담, 나직하고 잘게 소곤대는 저건 누구지? 미끄러워진 산길을 조심스레 걸으면서 귀담아 듣는다. 저건 틀림없이 진달래잎이다. 조그맣고 소박하면서도 화사했던 소꿉살림의 귓속말이다. 아마도 몰래 화전이라도 부치는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곰살스럽다. 느리고 둔한 저 아이는? 아하! 저건 산동백의 두둑한 뱃심인 게야. 녀석은 살집이 두텁고 단단해 음이 무겁고 웅장하다. 겉볼안이라고 겉모양과 속 심성은 비슷하니까 틀림이 없다. 조금 뒤처져서 수런거리는 잡풀들의 화음이 전체의 음을 아우르면서 절정에 이른다.

마른 잎들은 제각각의 모양새로 비를 받아 화음을 내는데,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우산만이 객쩍게 폭이 넓어 자주 절제를 놓친다. 뜬금없는 비음으로 쇳소리를 띄워 모두의 음에 훼방놓는다. 인간이 자연을 능가하기란 요원한 것인가 보다.

한데 모여 사四 계界를 살아낸 그들의 질서가 낮게 엎드려 삶을 노래하고 있다. 주위는 어느 오페라 못지않은 장대한 장이 되어 웅장한 화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원 교향곡의 한 장이다.

山의 올 한 해도 작년과 같이 힘들었을 것이다. 해마다 겪어야 하는 크고 작은 자연재난들.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 가는 산 공기의 양질을 걱정하며 열매도 익혀 산 식구들 겨우살이로 장만하지만, 세속의 사람들은 싹쓸이로 거두어가고 있다. 이 또한 인간은 자연보다 한 수 아래에 머무름이다.

숲도 자기도취에 흥겹다. 산은 현란한 화음에 혼이 빠져 있는 내게 다른 관객을 들여보내지 않았나 보다.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 자연은 혼신을 다하고 있고 그의 영혼에서는 청정한 물소리가 난다.

삶의 허구도 현실도 다 벗어놓은 자연의 품에서 가슴께로는 청잣빛하늘이 열린다. 경사지로 흐르는 물줄기에 가만 귀를 모으면 작은 도랑물 소리가 청아하게 쏘아 올리는 아리아의 환청에 빠진다. 귀를 모으면 모을수록 조용해지는 숲길이다. 습기를 밴 낙엽의 음이 낮아지면서 숨고르기를 한다. 카랑카랑하던 마른 우산도 나긋해졌다. 그 속에 묻혀있는 인간의 숨소리 또한 겸허해진다.

비는 땅도, 한 여인의 삶도 살찌우느라 목하 염불중이다.

 

 

《월간문학》 수필 등단. 경기신인문학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 대표에세이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