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

 

수필의 울타리를 넓히자

 

 

                                                                                       고봉진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비교적 형식면에서 자유로운 글이다. 그래서 외연이 넓은 편이다. 많은 글들이 수필 또는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수필 문단에서 산출되는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렇게 다양한 편이 못 된다. 어느 작품이나 지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글들이 많고 그것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고만고만해서 무척 단조롭다.

왜 그럴까, 그 연유를 살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좁은 울타리 내에 갇혀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필들이 주로 여러 가지 이름의 각종 수필전문지를 통해 발표되고 있다. 그러한 잡지들이 대체로 ‘수필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일정한 고정관념을 공유한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러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잡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니지 못하고 서로 엇비슷해서 하나같이 ‘서정수필’ 쪽으로 경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잡지들을 통해 비슷한 작품 성향을 지닌 많은 신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 동아리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작품을 발표하고 읽고 있어서 모든 작품의 내용들이 천편일률적이란 인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더하여 수필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것은 각종 수필 매체들이 하나같이 요구하는 원고 매수의 한정을 들 수 있다. 더러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 각종 매체가 정한 원고매수가 대충 200자 원고지 13매에서 15매 전후다. 이런 제한은 물론 수필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오직 매체의 편의를 위해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제한이 반드시 작품들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조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작품의 양산을 초래하기 쉽다.

위 두 가지 조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울타리 밖에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의 활동 무대는 극히 제한적이다. 작품 또는 작품집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웹상에 블로그로 발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거나 살아온 사람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글들을 접하게 되면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런 좋은 작품들이 보다 용이하게 또 다양하게 발표될 수 있도록 이제 우리 수필의 울타리를 낮추거나 넓혀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녀온 담론에 변화가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은 수필 또는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지 외부로 눈을 돌릴 필요도 있다. 구미를 중심으로 20세기 후반부터 문학에서 각 장르의 경계가 급격히 허물어지면서 지금까지의 개념으로는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에세이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더 한층 사색적이고 논의적인 글들이 많이 산출되고 있다. 새로운 문학의 조류 가운데서 에세이의 영역을 확장하며 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야를 가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들이 널리 읽힐 수 있도록 수필 전문지의 지면을 다각적으로 개방하고 틀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새로운 세대들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 내어 우리 수필을 보다 넓은 작품 영역으로 풍요롭게 가꾸어 가자.

(본회 부회장·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