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구 상

이 가을에 나는 그 문턱에서부터 탈이 났다. 양력 8월 그믐께 아침저녁과 밤이면 썰렁하곤 했었는데 그런 어느 날 어스름 때 옛 친구가 찾아와 함께 동네 횟집엘 가서 한 잔 마시고 들어온 김에 더웁길래 창문을 열어놓고 자다가 한밤중 깨어나니 지병인 천식이 도져 스무 날 가까이 자리보전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병에서 오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학교강의를 비롯하여 예정되어 있던 원고, 강연, 주례, 회합 등 약속이 모두 무너지게 되어 사람노릇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도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지난 3년 동안 여섯 차례나 되니 그 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은 와병 소문을 내기 싫어서 출타부재를 빙자하지만 남과의 약속한 일도 있으니 만부득 실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천식이 발작중이라 전화도 받을 형편이 못 된다.’고 알리게 되어 주변들을 놀라게 하고 그러다가 기침이 멎어 멀쩡해서 나가면 마치 거짓 늑대를 만난 소년의 꼴이 되는 것이다.

실상 천식이니 해소니 해서 예부터 집안에 그런 노인들이 한 분쯤 계셔 그저 저녁이나 밤이면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가라앉아, 일도 하면서 버티는 게 보통인데 나는 연전에 폐수술을 두 번이나 하여 호흡기능이 1천7백cc로 보통 사람의 반도 안 되는지라 한번 천식이 발작했다 하면 그야말로 금세 숨이 꼴딱 넘어가는 것처럼 괴롭다. 어지간해야 이번 병상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겠는가!

병상에서 내다보이는/책보만한 가을 하늘이/서럽도록 맑다. /오늘은 천식의 발작도 멎고/열기도 가시고/향유를 바른 시신처럼 편안하다. /나 자신의 갈구도 /무엇에 대한 미련도 벗어난/이 시각! /죽음아, 낙엽처럼 소리없이/다가오렴.

일반적으로는 죽음이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지만 인간의 육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오히려 죽음이 간절해지는 것을 나는 때마다 체험한다. 지금의 천식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해방 직후 원산에서 시집 《응향》 사건으로 필화를 입고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불기 하나 없는 가옥사假獄舍에서 얼어드는 추위와 피곤과 절망에 휩싸였을 때나, 또는 1965년 일본 동경 교외 기요세 병원에서 제1차 폐수술 후 그것이 탈을 내서 8, 9일이나 고통이 멎지 않았을 때도 바로 그랬었다. 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이즈막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희범 교수 부부의 동반자살이나 그 뒤 이를 본따듯이 젊은 미망인이 어느 호텔에서 추락 자살한 사건이나 이 모두가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안식을 취하려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죽음의 안식’이 그렇듯 뜻대로 와지느냐가 문제이다. 가령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즉 우리 영혼의 불멸이나 내세가 없이 육신의 죽음으로 종말을 짓고 만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고 공포가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죽음아, 다가오렴’ 하고 읊은 나는 그 시 다음 절에서는

앓아누워야만/천국행 공부를 한다. /마치 입시 전날에사/서두르는/게으름뱅이 학생 같다. /교과서야 있고/참고서도 많지만/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갈피를 못 잡고 허둥댄다. /그래서 재수부터 마음먹는/수험생처럼/‘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지만/번번이 헛다짐이다./이러다간 영원한 낙제생이 되지 싶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이렇듯 내 스스로를 따져볼 때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정체는 내세에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내세를 믿는다는 나는 왜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인가.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누구나 저승에서의 행복이 확보되어 있다면 못 가 본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내세에 대한 길흉의 가능성이란 스스로가 선택하고 스스로가 준비하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20세기의 현철賢哲인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마따나 우리는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작 품 : 구상의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 참석인원 : 18명

● 사 회 : 홍혜랑

● 정 리 : 정선모

● 일 시 : 2009년 11월 21일

●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사회 :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금년의 집중조명 마지막 회로서 구상 선생님의 <현존에서부터 영원을>이라는 짤막한 수필을 올렸습니다. 구상 시인의 시들은 우선 그 형식면에서 시인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메타포의 압축이 아니라 진술형이고 산문적입니다. 그분의 작품 중에는 시에 못지않게 많은 수필들이 있습니다. 수필집들도 많고요. 수필가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시인이지요. 그러나 수필의 문체들은 평이하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깊은 것들이 많습니다. 시인 자신의 말대로‘상상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는’말하자면 존재론적인 인간의 실존 문제에 닿아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작품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금년 2009년은 구상 선생님의 탄신 90주년이 되는 해이고, 작고하신 지 5주기를 맞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해 ‘구상 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선생님이 30여 년 거주하던 여의도의 관할 관청인 영등포구청과 ‘구상 시인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제정한 것입니다. 상금은 5천만 원이랍니다. 아마 동인문학상금이 5천만 원이지요. 수상작품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국립 동아시아 언어자원센터’에서 영역, 출간하게 됩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 나아가 노벨상에 도전하는 큰 뜻을 품은 큰 상인 것 같습니다. 고인에게 각별히 뜻 깊은 2009년도 연말에 수필 문우회에서 고인의 작품을 합평에 올리게 되어 뜻 깊게 생각합니다.

사실 주어진 짧은 합평시간에 작가의 심오한 인생관, 종교관, 사상과 철학을 조명해 본다는 것이 너무 벅차긴 합니다. 다른 집중조명 때도 느꼈지만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우선 변해명 선생님이 작가론을 발표해 주시고, 이어서 유혜자 선생님이 작품론을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토론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변해명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변해명 : 시인 구상 선생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상의 본명은 상준常浚이며.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나 1923년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로 이주하여 유소년기의 대부분은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보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를 중퇴했고, 1941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습니다. 1948년 월남, 1953년 왜관 정착. 1974년 서울로 이사. 2004년 5월 11일 작고하기까지 시인으로서 세속 권력이나 문단 내의 파벌에 휩쓸림 없이 초연하게 구도자적 사색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본적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9로 되어 있어, 그가 타계한 후 칠곡에 ‘구상문학관’이 세워졌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입니다.

그의 수필 <나의 문학적 자화상>에는‘가톨릭 사제가 될 것을 지망하고 열다섯 살에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환속하고, 제2의 출발로 문학을 택하였다.’는 말과 대학 입학 때도 문예과와 종교학과 두 곳에 합격했는데 종교학과를 택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톨릭신자로서 신앙심은 문학보다 우선했다고 생각합니다.

수필 <잠 못 이루는 밤에>, <꽃과 주사약>을 참고하면 1944년, 23세에 폐결핵의 첫 발병으로 원산에 있는 북선매일신문사 기자 생활을 접고 가톨릭 수도원에 가서 요양을 하는 과정에서 부인과 약혼을 했습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 시집 《응향凝香》에 시를 발표하면서 반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북한 당국으로부터 반체제분자로 몰려 1947년 부인과 맨손으로 탈출 월남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단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6·25 전쟁의 참상을 노래한 시집 《초토焦土의 시詩》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1957년)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는 주로 가톨릭 신앙에 바탕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 문인협회에서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들기도 하였습니다.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시인 고은 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와 교류하였습니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에 조예가 깊어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인식에 기반을 둔 독보적인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깊은 명상과 신비에 눈뜬 심오한 내면적 자유를 구현하는 시를 썼습니다.

현대시의 고비마다 강렬한 역사의식으로 사회현실에 문필로 대응, 남북에서 필화筆禍를 입고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지조를 지켜온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전인적 지성입니다.

구상 시인은 유난히 강을 좋아한 시인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치나 풍경으로서의 강보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강을 바라보게 된 것은 ‘그리스도 폴’이라는 가톨릭 성인의 설화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접한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거기 주인공들은 강을 회심의 수도장으로 삼고 있는데 그런 강에 대한 상념이 강을 연작시의 소재로 삼게 되었고, 왜관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강> 60편을 완성하면서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았습니다.

구상 시인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때문인지 문학은 항상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주된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신심을 가다듬기 위하여 복음의 묵상서 《나자렛 예수》와 신심시선 《말씀의 실상》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연작시 <강>, 자전시집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시집 《구상》, 《초토焦土의 시》, 《그리스도 폴의 강》, 《타버린 땅》, 《유치찬란》, 《밭과 강》,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등 10여 권의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시와 삶의 노트》,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 《삶의 보람과 기쁨》, 《우리 삶, 마음의 눈이 떠야》, 《시와 삶의 노트》 등이 있습니다.

사회 : 구상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워낙 광범위하여 토론자들이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세히 조사하여 주신 변해명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변해명 선생님 말씀대로 구상 선생은 열다섯 살에 가톨릭 사제가 될 것을 지망하고 수도원 신학교에 갔다가 3년 만에 중퇴합니다. 일반학교로 전학했지만 금방 퇴학당합니다. 불평불만을 일삼는다는 조선인들,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들과 어울려 문학 활동을 벌이다가 경찰서 유치장을 들락거렸습니다. 노동판을 전전하며 야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마침내 일본으로 밀항하게 됩니다. 니혼대학 종교학과 전문부에 들어갑니다. 어머니가 가톨릭의 선각자 이승훈 선생의 가문이기 때문에 선생님은 천주교의 모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나라 일본에서 종교학을 공부하는 동안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이 불교경전의 주석이었답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신의 실재, 신의 섭리, 교리 등에 대한 의심과 회의에 시달리며 ‘나는 저주받은 영혼인가’ 하고 탄식할 정도로, 신은 젊은 구상시인에게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동요와 불안의 대상이었습니다. 동경유학 시절 날마다 다다미방에서 신의 장례식을 지냈다는 저항적 기질의 구상 시인이 신을 찬미하는 작품을 쓸 수 있기까지 남모르는 영혼의 고뇌를 엄청나게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유혜자 선생님께서 구상 선생님의 작품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유혜자 : 오늘의 지정 작품 외에 <인간, 그 정의를 내려보면>, <동일선상의 주자들에게>, <청춘과 연애>, <시비정신> 등을 읽어봤는데요. 체험을 통해 터득한 인생의 의미를 피력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의미를 찾게 하는 설리設理적인 수필이었습니다. 이 작품들도 대체적으로 문장이 깁니다.

<현존에서부터 영원을>도 우선 문장을 살펴봤는데 문장이 좀 긴 편입니다. 4~5개로 나눌 수 있는 문장이 하나로 묶여 있기도 합니다. 이런 복합문의 사용은 필자의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간결미가 없지요. 수필은 독자가 부담 없이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표현 양식이기 때문에 이런 특성과 장점을 살리려면 문장도 가능하면 깔끔한 간결체가 만연체보다 수필 문장에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수필은 문장미를 통한 예술성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 또는 젊은이의 감각에도 이런 문장이 환영받을 겁니다.

네 번째 문단의 ‘실상 천식이니 해소니 해서 예부터 그런 노인들이 한분쯤 계셔 그저 저녁이나 밤이면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가라앉아, 일도 하면서……’ 이렇게 써나간 문장이 그런 복합문의 예입니다.

두 번째는 문장 구성 요건이 지나치게 생략된 경우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위의 문장에서 보면 ‘고통을 받다가도’가 무엇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인지요. ‘심한 기침으로’ 로 짐작은 되지만 명사의 조격조사造格助詞가 있어야 하고, ‘낮에는 가라앉아’에서도 무엇이 가라앉는지, 그것에 대한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고쳐보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다.

‘실상 천식이니 해소니 해서 예부터 그런 노인들이 한 분쯤 계셔 그저 저녁이나 밤이면 심한 기침으로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기침이 가라앉아 또는 기침이 멈춰서, 또는 고통이 멈춰서, 일도 하며…….’

문장에서 주어 서술어 목적어 중 일부가 때로는 생략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칫 의미 전달의 정확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또 이 문장은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천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노인입니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저녁이나 밤이면 기침으로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가라앉는다.’고 했을 때, 기침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가라앉는 것으로서 노인이 가라앉는다의 주어 역할을 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엄격히 따지면 문장 구성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인이 쓴 수필이어서 자작시를 두 군데나 넣었는데 시를 넣어서 단절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대로 산문으로 풀어서 쓰는 것이 더욱 수필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의 주제는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극복의 방법이며, 그 방법은 ‘현존에서 영원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에 대한 작자의 해석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작자는 우리가 ‘육신의 죽음으로 종말을 짓고 만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고 공포가 있을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작자는 내세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진다고 했지요. 이것은 천당 갈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렇지만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 의식은 일단 누구에게나 주어진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없이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면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은 좋습니다. 종교적인 표현이며 우상적이긴 하지만 살아있을 때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신앙이 없는 독자에게도 좋은 결론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 유혜자 선생님께서 구상 시인의 문장론과 의미론을 균형 있게 다루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회원 여러분의 자유 토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한형주 : 내가 살고 있는 실버타운에서 노인들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노인에게 천식은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견디기 힘든 천식을 구상 선생님께서 앓으셨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젊어서 결핵을 두 번이나 앓았다니 살아오면서 질병의 고통을 많이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존에서부터 영원을>과 같은 글을 쓰신 듯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나이든 사람으로서 매우 실감나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김시헌 : 인간이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가 병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구상 시인도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신 듯합니다. 종교인들은 천당에 간다, 지옥에 간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상 시인은 현재 존재하는 이 곳에서 영원을 얻어야지 사후에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신 듯합니다. 그래서 제목으로 달 정도로 절실한 문제이고, 작가는 이미 그러한 경지에 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 : 원로 선생님들께 너무 무거운 주제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직접 체험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고봉진 : 고등학생 때 대구에서 구상 시인의 문학 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존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강의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실존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지대할 때였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어도 음성이 또록또록하고 힘차며 혈색도 좋아보였습니다.

제목의 ‘현존’이란 단어는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현존’이라 하지 않고 ‘현존재’라고 하지요. 독일어로는 ‘다자인Dasein’이라고 합니다만 한자의 뜻인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보통 세 가지로 ‘현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인간 혹은 생명, 현재 있음 등을 현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처음에는 싸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참여하다 싸르트르가 후에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로 흐르자 거기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구상 시인도 실존주의 사상에 깊이 심취하였기에 ‘현존에서부터 영원을’이라는 글을 쓴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인이기 때문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고 했던 유혜자 선생님의 의견과는 달리 지금 읽어도 충분히 문장이 간결하고 의미 전달이 잘 된 글이라 생각합니다.

사회 : 고 선생님께서 가브리엘 마르셀에 대해 언급을 하셨는데요, 사실 굉장히 어려운 철학자 아닙니까? 철학을 전공하신 엄정식 선생님께서 그 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엄정식 : 실은 며칠 전 홍혜랑 선생님으로부터 마르셀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철학에서 마르셀의 위상이 굉장히 높았지만 지금은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대개 현대사상에선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 부류가 있고 러셀, 비트겐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과학철학 부류가 있으며, 지금 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실존철학이 있는데 이게 또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키에르케고르를 중심으로 한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니체, 하이데커, 싸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마르셀은 상당히 다이내믹한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자이자 극작가이며 동시에 작곡가였으니까요. 철학이 사색의 역할을 했다면 내면의 세계를 외부에 표출하고자 극작가가 되었고, 리듬을 타면서 신비와 영원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장르가 다른 것 같지만 온몸으로 철학에 올인한 철학자였습니다. 정통 철학 라인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모두 철학과 연관이 있습니다.

원래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40대 들어서면서 모리악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합니다. 형이상학적 가톨릭 신자였으며 수도자적 자세로 명상에 잠기는 태도를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가톨릭보다는 불교적 사유가 더 이해가 쉬운 뉘앙스를 풍기는 철학자여서인지 구상 선생님이 여러 맥락에서 상당히 좋아했던 철학자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내세가 확실치 않아서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깝습니다. 정다운 사람, 모차르트 음악, 야구중계 못 듣는 것 등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가장 결함이 있는 부분은 마지막 문장이라고 봅니다. 지나치게 강한 메시지를 주려 해서 감동이 덜합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을 꼭 넣었어야 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사회 : 마르셀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상 선생님 수필 중에 일본 유학 시절 어느 고서점에서 구입 한 책이 바로 마르셀의 책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책을 읽고 ‘만남의 비의秘意’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운명적 만남이라는 뜻이지요. 그 구절을 보고 구상 선생님을 이해하려면 마르셀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엄정식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럼 다음 분 말씀해 주시지요.

김병권 : 앞에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저는 각도를 달리해서 요즘은 수필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추세라서 퓨전수필이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현학적이고 난해한 이 글을 읽으면서 앞으로는 퓨전수필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상 선생님은 평소 말씀할 때도 난해하고 현학적인 편이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감동을 주거나 재미있는 글을 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가가 살아온 시대가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 하더라도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아 성공적인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태동 : 구상 선생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인품이 훌륭하고, 필체도 좋으며 카리스마도 있는 분이지요. 실은 제가 작년에 ‘한국시의 정체’라는 책을 냈는데 구상 선생님이 빠졌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문학 주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시는 언어 자체가 답답하고, 현실과 괴리가 있으며 장황하고 현학적입니다. 한국 문단의 비주류에서는 추켜세우고, 주류에서는 미치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이 작품을 살펴보면 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한 점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문장에 대해 몇 분이 말씀하셨는데 이런 주제의 글을 짧게 쓰면 글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 글이 교훈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술은 보여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건 종교지요. 문학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관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있음’을 확대하는 것이 삶의 의미인데, 존재를 모두 영원에 종속시켜 버리면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건 문학이 아니고 종교입니다. 문학은 철학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학은 문학이고, 철학은 철학입니다. 시적詩的으로는 몰라도 산문으로는 취약한 점이 많습니다. 한국 시단에서 소외받는 이유가 현실보다는 항상 내세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현실부정이라는 점에서 문학으로서는 약점이라 생각합니다.

박영자 : 인간의 죽음, 고통을 두 페이지로 썼다는 건 대단한 필력입니다. 앞면은 육신의 고통, 뒷면은 내세 혹은 죽음을 다뤘습니다. 죽음을 마주한 사람에게는 공감을 줄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오는 과정을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 부분이 빠져서 아쉬웠습니다.

최병호 : 뜻대로 와지지 않는 죽음의 안식이란 말에는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작가의 병으로 인한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죽음이 간절해지는 것을 체험한다는 문장에 이어 교수 부부의 동반자살, 젊은 여인의 추락 자살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모두 죽음의 안식을 취하려는 행동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능동과 수동이 같게 해석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앙드레 말로의 소설에 한 테러리스트가 가슴에 폭탄을 안고 전차바퀴 밑으로 들어가며 “50년이나 70년 살 걸 순간적으로 불꽃 튀듯 사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구상 시인의 말처럼 그는 과연 안식을 기다리는 것인가요? 성실하고 충직하게 산다면 영원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지 현존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종교적 내세관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세윤 :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천식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면 현실을 긍정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내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막연히 내세를 떠올리는 것이지 내세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지요. 이 글은 내세를 정해놓고 써서 공감을 얻기 힘듭니다. 내세를 믿게 된 과정을 좀더 리얼하고 설득력 있게 썼더라면, 현실을 좀더 의미 있게 살아야 내세가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유도했다면 좀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문혜영 : ‘죽음’은 제가 몇 년 동안 맞닥뜨린 참으로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언제 쓴 글인가 조사해보니 글에 나오는 동반자살 사건이 1981년도에 일어났더군요. 구상 선생님이 60대 초반이었을 때입니다. 당시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철학은 이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전율한다.’라는 구절처럼 읽는 내내 전율했습니다. 누구나 극한의 고통 앞에서는 그것을 닫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 모두 폐질환으로 잃고, 견디기 힘든 천식의 고통을 겪으신 분입니다.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오히려 죽음이 간절해진다.’라고 한 부분을 읽으며 매우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결미 부분에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한다.’라고 무 자르듯 자른 것 때문에 설득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만연체로 늘어진 부분도 아쉽고, 좀더 쉽게 풀어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선화 : 죽음에 대한 글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끝부분에 와서 구상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세를 믿는다는 나는 왜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인가.’ 하는 문장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종교적 차원이 높은 글을 썼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문제를 초월하지는 못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채은 : 구상 시인이 TV에 나와서 말씀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을 보며 참 독특한 시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학을 그만둔 작가의 고뇌가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세나 죽음에 대한 글은 끝이 없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달포 넘게 기관지염으로 기침하느라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구상 선생님은 그보다 훨씬 힘든 상태에서 이 작품을 썼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으로 쓰지 않았을까요? 작품성을 떠나서 육신의 고통 앞에서 솔직하고 진솔하게 토로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임순 : 이 글이 구상 선생님이 60대에 쓴 글이라면 돌아가시기 20년 전에 쓴 글이네요. 사람은 육신의 고통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에 가는 것입니다. 돌아가기 직전에 썼더라면 어땠을까요? 죽음을 앞에 두고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죽고 싶다고 해도 죽지 않습니다. 건강할 때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진심이 아닙니다. 내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사회 : 회장님께 마무리 말씀 부탁 드립니다.

허세욱 : 오늘은 계간 수필의 방배동 시절을 마감하는 자리인데 어려운 작품이 올랐습니다. 최근에 와서 가장 신랄한 합평회였습니다. 구성론, 수사론, 문장론 등 각 방면으로 문제의 제기도 다양했습니다. 전체적인 문장으로 볼 때 문학 속의 종교란 어려운 명제를 푸느라 상당히 무리가 보인다는 지적들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동양론적 삼단논법으로 풀이했습니다. 바로 정반합正反合 3단계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정正은 작가가 천식의 고통 속에서 현실적으로 죽음을 면대하고, 반反은 너무 괴로우니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고 죽음의 시각을 바꿔봅니다. 합合은 이지理智로 돌아와서 다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결론은 주역적인 맛도 납니다. 하나를 낳고 둘을 낳다가 만물을 낳는다는 사고로 대입이 됩니다. 다양하게 토론이 이어진 재미있는 합평회였습니다.

사회 : 오늘 합평한 이 작품은 선생님이 2001년도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강연한 원고의 압축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모두에서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선생님들께서 작품 흐름의 비약을 지적해 주신 것 같아서 사회자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그날의 강연 원고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사는 것’인가 하는 선생님의 고민하는 인생관이 제시되어 있지만 시간의 제약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 수필의 주제가 더 압축된 것이 선생님의 <오늘>이라는 시입니다. 나중에 제목을 <오늘서부터 영원을>이라고 고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영원과 오늘’의 관계는 구상 선생님 문학의 중심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학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시의 제재나 주제는 물론 정한이나 낭만의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인식의 추구나 몰입으로 일관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시가 지향한 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원 속의 오늘을, 오늘 속의 영원을’ 조응하려는 갈망과 갈원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나의 시는 그 조형에 있어서도 비유나 심상이 감각 위주이기보다 논리적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선택한 짧은 이 한 편의 글 속에는 작가의 전인적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선생님들께서 열띤 발표와 토론을 해주신 덕분에 오늘의 합평은 구상 문학의 변방이 아니라 가장 중심을 붙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합평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