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수필가의 八十 회고록⑦|

 

지나온 발자취(2)

 

 

                                                                                      김규련

영양군은 비록 궁벽한 오지이지만 산천경관이 수려하고 출중한 인재가 많이 태어났다. 민심 또한 소탈하고 후덕해서 타관 사람들을 너그럽게 보듬어 주었다.

대낮에 술 취해서 실수하면 자연풍광이 유죄고 옥계수가 공범이라 하고 밤에 대취해서 탈선을 하면 밝은 달이 유죄고 소쩍새가 공범이라며 감싸주고 눈 감아줬다.

이곳에서 교육행정은 물론 문화운동에도 열성을 다했다. 조지훈의 고향마을 주실에 비로소 그의 시비를 세웠으며 오일도의 시비건립을 추진하다 나는 대가야의 고도 고령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씨 문중에서 내가 떠난 다음 해 그 시비를 완성했다.

고령군은 옛 대가야의 유적이 많아서 수필 소재로 활용하기에 좋았다. 〈고분군을 돌아보며〉, 〈대가야의 토기〉, 〈무정설법〉 등이 그랬다. 나는 수필문학진흥회에 가입해서 《수필공원》에 꾸준히 작품을 투고해 왔다. 독자로부터 독후감을 담은 편지가 심심찮게 오더니 하루는 서울에서 R여사가 찾아왔다. 작은 고을에 금세 소문이 나서 타 기관장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81년 10월 9일 경남중학 동기생인 고 김우현의 권유로 수필문우회 창립총회에 참여했다. 그날 비로소 김태길 회장을 비롯하여 차주환, 김우종, 허세욱, 유경환, 정진권, 윤형두, 윤모촌, 변해명, 유혜자, 정목일, 이병남 등 저명작가들을 뵙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그 해 10월 25일 동학사 군교의 금수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십여 명의 동인이 모여 제 1차 합평회를 가졌다. 합평작품은 이병남의 〈그림 속의 아이들〉과 나의 작품 〈대가야의 토기〉였다. 다음날 동학사까지 산행을 하여 계룡산의 가을 풍취에 흠뻑 젖어 봤다.

교육장 임기를 채우고 내가 처음으로 교단에 섰던 군위중고등학교로 돌아왔다. 삼십여 년 만에 옛 땅에 귀향하니 감회가 무량했다. 산천은 옛 그대로인데 사람은 가고 없고 물정도 인심도 변해 있었다. 이를 두고 제행무상이라 하는 것인가.

하루는 뜻밖에도 문교부 편수국에서 전화가 왔다. 나의 작품 〈거룩한 본능〉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고자 한다는 것이 아닌가.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영혼의 진동 같은 것을 느꼈다. 빛나는 화관을 머리 위에 얹는 기분이라 할까.

곧이어 동아출판사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참고서 출판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작품 활용권을 쉽게 내주고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원고료를 받았다.

이 년 뒤 포항고등학교로 전근 갔을 때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이 열렬하게 환영해 줬다. 까닭은 우리 교장의 수필이 교과서에 실려 있어 그것을 자랑과 긍지로 삼고 학생들이 더욱 면학에 열중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부모의 한恨을 푸는 해한解恨의 장이었다. 미치지 아니하면 미치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기치 아래 전교생은 학업에 열중해서 그 성과도 기록적이었다.

포항은 한흑구 선생도 돌아가시고 수필문학의 불모지였다. 다행히 뜻있는 문우인 빈남수, 서상은, 성홍근, 이기택, 이삼우, 손일석, 박성준, 장현 등이 있어 형산수필문학회를 창립할 수 있었다. 모두들 나를 떠밀어 초대회장으로 나서게 했다.

회원들의 직종이 다양했다. 의사, 군수, 교수, 검사, 식물원 원장, KBS 포항지국장, 포스코협력회사 사장, 기업주 회장, 교장 등이라 월례회 때마다 모이면 화제가 풍부해서 흥미진진했다. 영일만의 야경을 바라보고 소주와 회를 즐기며 작품합평회를 체험한 것은 인생의 낙이요, 보람이요, 우정의 다짐이었다.

나의 숙명인 역마살이 삼 년 뒤 구미시에 있는 경북교원연수원장으로 직책을 바꾸게 했다. 초대 원장은 운영계획이며 공사감독이며 안팎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허나 새로운 교육기관을 하나 탄생시킨다는 소명감으로 늘 보람차고 즐거웠다.

개강이 시작되자 김태길 회장을 특강 강사로 모셨다. 강의 주제는 ‘도덕성 회복운동’이었다. 그날 청강했던 800여 명의 초·중등교장들은 큰 자극과 감동을 받았다.

나는 연수원장 재직 5년 동안에 말재간이 늘어서 한국교원대학이며, 중앙교육공무원 연수원이며, 서울교원연수원을 위시해서 타 도 교원연수원과 기업체연수원에 출강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상은 구미시장과 지역 문사들과 뜻을 모아 한국문협구미시지부를 유치했다. 권유에 못 이겨 내가 초대 지부장을 맡았다. 88년 여름에는 한국수필문학진흥회와 수필문우회 공동주관으로 경북교원연수원에서 1박 2일의 수필문학 세미나를 가졌다. 그날 이응백 회장과 조병화 시인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필가들을 만나 뵙게 되어 기뻤다.

다음날 금오산 등반에서 구미공업단지를 내려다보고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 방문과 코오롱 구미공장 견학은 의미 있는 행사였다. 빈곤에서 해방되어 산업화사회로 약진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 동력의 근원을 눈 밝은 문인은 헤아렸으리라 믿는다.

이순耳順의 유역을 지나면서 세월은 꿈결같이 지나갔다. 잠시 잠깐 사이 연수원장에서 포항여고 교장으로 이동됐다가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퇴직하고는 별 볼일 없는 교육위원 몇 해 지내고 대구에 나와 여러 대학 평생교육원에 출강했다. 수필창작대학에서 특강을 해오다 그것도 힘겨워 물러났다.

나는 그동안 교단과 문단을 오가며 늘 감사하는 마음과 기도의 자세로 살아왔다. 교단생활에서는 만여 명의 젊은이를 인간답게 살도록 길러냈다고 할까.

그 중에는 크게 출세하고 성공한 녀석들도 있지만 양식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우리 사회를 지키는 제자가 많다는 것이 자랑이라 하겠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고 이름 없는 잡초가 인덕을 보호한다고 했던가. 못생긴 나무가 오래 살아남아 마침내 대들보가 된다.

문단활동에는 길을 물을 수 있는 이정표가 넷 있었다. 그것은 명망 있는 네 분의 작가가 내 작품에 관해 논술한 평론이었다.

김시헌의 〈김규련의 수필세계〉, 황송문의 〈선禪과 정한情恨의 모자이크〉, 〈김규련 수필론〉, 정진권의 <수필隨筆>, 그리고 사랑과 삶에 관하여, 김규련의 <거룩한 본능, 고考>, 윤재천의 <자연 속의 선인仙人의 풍모>, 김규련의 <개구리 소리를 텍스트로> 등이다.

끙끙거리며 써 모은 작품을 책으로 엮어도 봤다. 《거룩한 본능》, 《종교보다 거룩하고 예술보다 아름다운》, 《소목素木의 횡설수설》, 《높고 낮은 목소리》, 《귀로의 사색》, 《즐거운 소음》 등 겨우 여섯 권이다.

내 생에 심혼의 감동으로 다가온 광영이 하나 있다고 할까. 그것은 경북교육자대상도 아니고 한국교육자대상도 아니며 SBS방송의 서암교육자대상도 역시 아니고 국민훈장 석류장은 더더구나 아니다.

또한 한국수필문학상이니 신곡문학대상이니 향토아카데미문학상이니 흑구문학상이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작품 〈거룩한 본능〉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사실이라 하겠다.

수필쓰기는 마침내 수행이요, 구도요,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나는 남보다 앞서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려는 헛된 야망으로 앞만 보고 질주했다.

그러다 수필을 쓰면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야 나의 무명無明에 한 줄기 햇빛이 빗금을 그었다. 인생관의 혁신이 왔다. 출세한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 성공한 삶보다 의미있는 삶, 외면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풍요함을 갈구하게 됐다.

사람은 연륜에 따라 삶의 지표가 있다. 40대는 불혹, 50대는 지천명, 60대는 이순, 70대는 종심이다. 그 이상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나는 나름대로 80대는 무애無碍, 90대는 무치無恥, 100대는 접신接神이라고 본다.

나는 이제 무애의 나이에 이르렀다. 무애는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색공불이色空不二의 심오한 진리를 헤아리며 방하착放下着을 해야 하리라. 무시로 떠오르는 온갖 망상과 번뇌와 상념을 죄다 내려놓아야 할 터이다. 내 이름 앞뒤에 따라다니는 모든 수사어도 미련 없이 씻어내야 하겠다.

유년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 하동 섬진강변의 풀꽃을 따며 친구들과 소꿉질 하듯 늙은 아내와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찾아오는 인연 따라 그때그때 집착 없는 마음으로 희로애락도 즐기면서.

그래도 미완의 꿈 하나는 남겨둬야지. 독자의 가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작품 한 편은 꼭 창작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