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산문⑥

 

<돈키호테의 특이한 마법>

 

 

                                                                                     보르헤스

다음의 관찰은 언젠가 그리고 아마도 여러 번 얘기되었음 직하다. 나의 관심은 새로운 것이냐의 여부보다 그것이 지닐 수 있는 사실성의 여부이다.

다른 고전 작품들 〈일리아드〉, 〈에네이다〉, 〈화르살리아〉,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희극과 비교하면, 〈돈키호테〉는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것의 사실주의는 19세기적 관행의 사실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콘라드 Joseph Conrad는 그의 작품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였는데, 그것을 용인함으로써 일상적인 것이 경이롭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의 직관에 세르반떼스 Miguel de Cervantes 가 견해를 같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돈키호테〉의 형식이 그로 하여금 시적 상상의 세계에 산문적 현실세계를 대응시키도록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콘라드와 헨리 제임스 Henry James는 현실이 시적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설화 했다. 세르반테스에게 있어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그는 〈아마디스 Amadis〉의 거대하고 막연한 지리 상황을 가스띠야의 먼지길과 누추한 주막으로 대치시킨다. 우리 시대의 어느 소설가가 패러디적 의미로 주유소를 등장시킨다고 상상해보라. 세르반테스는 17세기 스페인을 우리에게 시로 창조해 주었지만, 저 17세기 당시나 스페인은 그에게 결코 시적이었을 수 없다. 만차 지방의 회상으로 감회에 잠기는, 우나무노Uanamuno나 아소린Azorin이나 안또니오 마차도 Antonio Machado같은 사람들을 세르반테스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구도는 경이적인 것을 금기시하게 했다. 그러나 경이적인 것은,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탐정 소설의 패러디에서 범죄와 미스터리처럼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세르반테스는 부적이나 점을 쓸 수는 없었지만, 미묘한, 바로 그래서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암시했다. 은밀하게도, 세르반테스는 초자연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폴 그루삭 Paul Guoussac은 1924년에 다름과 같이 피력하였다. ‘라틴어와 이태리어의 다소 그릇된 모방에도 불구하고,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수확은 무엇보다도 목가소설과 기사도소설, 흥미로운 포로담에서 얻어진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들 픽션의 해독제라기보다 그로부터의 향수 어린 은밀한 이별이다.

현실에 대해, 각각의 소설은 상상적 도면이다. 세르반테스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독자의 세계와 책의 세계의 혼돈을 즐긴다. 이발사의 턱받이인가 투구인가, 안장인가 갈기 장식인가의 논쟁을 벌이는 몇몇 장章에서 그 문제는 명시적으로 대두된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암시적이다. 제1부 6장에서, 신부와 이발사는 돈키호테의 서재를 조사한다. 놀랍게도 조사된 책들 중의 하나는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떼아 La Galatea>였으며, 게다가 이발사는 세르반테스의 친구임이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세르반테스를 지나치게 칭찬하지 않고, 그가 시보다는 불행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의 책은 어떤 훌륭한 점이 있는데 무언가를 제기하고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르반테스의 꿈 또는 세르반테스의 꿈의 형식인 그 이발사가 세르반테스를 평가한다……. 역시 놀라운 것은, 소설 전부가 아랍어에서 번역된 것이요, 세르반테스가 똘레도 시장에서 필사본을 구하여, 어느 아랍계 사람으로 하여금 한 달 반 이상이나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번역하게 했다는 사실을 제 9장 첫머리에 이르러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의상철학Sartor Resartus>이 디오게네스 토이펠스트로에크 Diogenes Teufedroe-ckh 박사에 의해 독일에서 발표된 작품의 부분 번역이라고 위장했던 카알라일 Carlyle을 떠올리게 된다. 가스띠야의 유태승 모이세스 데 레온 Moises de Leon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조하르 또는 광휘의 서書 Zohar o Libro del Esplendor>를 저술하고는 그것이 3세기의 팔레스타인 율법사의 작품이라고 유포시켰다.

<돈키호테>의 진기한 모호성의 유희는 제2부에서 절정에 이른다. 주인공들은 제1부를 읽었으며, <돈키호테>의 주인공들은 또한 <돈키호테>의 독자들이다. 여기서 필연, <햄릿>과 얼마간 유사한 비극의 상연무대를 <햄릿>의 무대에 포함시킨 셰익스피어의 경우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주작품과 부작품의 불완전한 일치는 그 삽입의 효과를 감퇴시킨다. 세르반테스와 유사한, 아니 더 놀라운 기교는, 라마의 무용과 그의 악마와의 싸움을 서술한 발미키 Valmiki의 시<라마야나Ramayana>에 나타난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라마의 자식들이 숲 속의 은신처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어느 고행승으로부터 글을 배운다. 야릇하게도, 이 스승은 발미키였다. 라마는 말의 도살을 명하고, 발미키는 자기의 제자들과 그 축제에 참가한다. 이들은 하프에 맞추어「라마야나」를 노래한다. 라마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자식들을 알아보게 되며 시인에게 보답한다… 우연은 <천일야화>에도 유사한 예를 남겼다. 이 환상적인 이야기집은 중심 이야기와 그로부터 돌출하는 이야기의 분기를 현기증 날 정도로 거듭해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을 집중시키지 않아서, 그 효과는 (마땅히 심오했어야 하는데) 페르시아의 양탄자처럼 피상적이다. <천일야화>시리즈의 머릿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에 들고 동틀 녘이면 참수시키라는 왕의 비극적 맹세, 그리고 천 하루 밤이 지날 때까지 왕을 이야기로 사로잡고 그 마지막 밤을 지내고는 왕에게 아들을 보여주는 세헤라자데의 결연함. 천 하나의 부분을 채우느라 필경사는 각양각색의 얘기들을 끼워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밤 중에서도 602번째 마술적 밤의 이야기만큼 당혹스러운 것은 없다. 그 날 밤, 왕은 왕비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른 모든 이야기와--기괴하게도--그 이야기 자체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의 시작을 듣는다. 독자는 이 이야기의 삽입이 시사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그 기이한 위험성을 명확히 직관하는가? 왕비는 영원히 살 것이며, 꼼짝않는 왕은 잘려진, 그러나 이제 무한으로 순환하는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영원히 듣게 될 것이다… 철학의 창안은 예술의 지어내기 만큼이나 환상적이다. 조시아 로이스 Joshia Royce는, 그의 저서 《세계와 개인 The world and Indivi dual》(1899) 제 1권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영국 땅의 한 부분이 완전한 수평을 이루고, 거기에 어떤 지도제작자가 영국의 지도를 그린다고 상상하자. 그 작품은 완벽하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지도에 기록되지 않는 영국 땅의 세부사항은 없다. 모든 것이 지도와 상응한다. 이 경우 그 지도에는 지도 속의 지도가, 또 여기에는 지도 속의 지도의 지도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

지도 속에 지도가 들어 있고 <천일야화>에 천일야화가 들어있는 것이 왜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가? 돈키호테가 <돈키호테>의 독자가 되고, 햄릿이 <햄릿>의 관객이 되는 것이 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러한 뒤집기는 허구의 인물이 독자요 관객일 수 있으며, 그들의 독자요 관객인 우리들도 허구적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833년, 카알라일은 세계사란 모든 인간이 쓰고 읽으며 이해하려 하는 무한한 성전聖殿이요, 그들도 또한 그 책 속에서 씌어진다고 피력하였다.

출전 : 에세이집 《속 탐문집 Otras inquisciones》 (1952) ( 옮긴이 김춘진)

 

 

해설                                                              

 

                                                                         김춘진

아르헨티나가 나은 20세기 가장 의미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 보르헤스의 에세이는 간결하면서도 지적 깊이가 있다. 픽션에 역사와 에세이 형식이 뒤섞이고 에세이에는 무궁한 지적 편력과 문학적 상상력이 경계 없이 뒤섞이고 어울려 인식과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 이 새로운 심미적 사유의 지평은 20세기 말 세계로 확산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주목받았다. 거기서 서양 근대 철학의 근간이 된 데카르트 합리주의 전통을 회의하고 비판해 진리의 상대성과 가치의 다원주의를 내세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원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픽션과 역사, 사실과 허구 사이를 넘나들며 인식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드러내 상상력을 확장하고 심미적 유희를 일구어낸다. 그 출발점은 기존의 세상보기를 뒤집어 보는 것이다. 철학의 출발점이 세상 뒤집어보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것은 그렇게 해서 보르헤스가 철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논리를 허물어 심미적 세계로 넘어선다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특이한 마법〉은 세상 뒤집어보기에 대한 문학적 비유이자 철학적 단상이다. 돈키호테를 읽는 해석의 자의성과 상대성을 되새기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체계를 쉽게 전도시킬 수 있는 사유의 원형에 도달한다. <햄릿> 속의 햄릿, <돈키호테> 속의 돈키호테, 지도 속의 지도는 세상 뒤집어보기로 세상을 이해하는 데 철학과 문학이 어울린 상상력의 결정들인 것이다. 그렇게 보르헤스는 세계의 무한성과 미적 형식의 완결성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키호테의 특이한 마법〉은 허구와 사실,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르헤스의 사유와 글쓰기의 근간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세상이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지적 구성물, 즉 기호체계라는 말이다. 그래서 허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스스로 읽는 주체인 동시에 읽혀지는 대상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무한하고 사유는 무진하게 유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어서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스페인중남미연구소장.

《스페인 피카레스크소설》 (대우총서 아르케, 1999),

《보르헤스》 (문학과지성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