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이상옥

얼마 전에 친구들과 메일을 주고받던 중 이야기가 브람스의 레퀴엠 쪽으로 흘러갔다. “이 곡은 흔히 ‘독일 진혼곡’이라고 불리곤 했지만, 여느 진혼곡과는 달리, 가사가 라틴어가 아니라 독어 성경 구절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곡의 원명 Ein deutsches Requiem은 ‘독어 레퀴엠’ 혹은 ‘독어 진혼곡’이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곡 이외에도 모차르트, 포레, 베르디, 브리튼 등의 레퀴엠도 가끔 듣지만, 그 중에서 브람스의 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곡 자체가 워낙 명품인데다 그 가사의 뜻을 내가 이럭저럭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시漢詩로 된 가사를 뜻도 모르며 노래하던 사람이 순수한 우리말 가사를 노래할 때 느끼게 될 해방감이랄까 편안함과 관련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요지의 메일을 보냈더니 이내 한 친구가 ‘독어 레퀴엠’을 들을 때의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 왔다. 우리가 삶의 황혼기로 접어 든 지 오래된 사람들이므로 ‘진혼’에 대한 내 나름의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기대하며 보내 온 물음임에 틀림없지만, 막상 답을 하려니 난감했다. “그저 좋아 한다”고만 한다면 너무 성의 없는 답이라는 나무람을 면치 못할 터이고, 이 곡에는 듣는 이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오랜만에 <독어 레퀴엠>을 끄집어내어 다시 들어 보니, 70분이나 끄는 긴 곡에서 어느 한 곳 허술한 대목이 없다. 그리고 한 편의 ‘진혼곡’답게 이 곡은 슬픔과 체념의 기조基調를 띠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특히 처음 두 부분을 좋아하는 편이다. 제1부 ‘슬퍼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에서 첫 합창의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다.

슬퍼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위안를 받을 것이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게 되리라

이 합창 덕분인지 이 곡은 처음부터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내 영혼을 진정으로 움켜잡는 듯한 대목은 제2부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의 합창에서 몇 차례 반복되는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도 풀꽃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지나니

여기서 얼핏 떠오르는 것은 물론 우리 동양권 사람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초개草芥같은 인생’이라는 어구이다. 이 닳아빠진 비유법이 브람스의 음악 속에서는 조금도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음악이 부리는 조화 때문일 것이다. 그 조화는 비단 이 진혼곡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교향곡과 피아노협주곡, 그리고 클라리넷5중주, 피아노5중주, 현악6중주 같은 실내악곡에서도 그 신통력을 발휘하여 우리 모두를 브람스 애호가로 만들어 주지 않나 싶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일생 또한 허망하다는 것을 노래하는 제3부 ‘주여, 나의 종말을 알게 하소서’에서도 제2부의 기조는 이어진다. 그리고 제4부 ‘주의 장막은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가’와 제5부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지만’에서도 인간은 마땅히 하느님의 집에서 살아야 하며 그래야 기쁨, 위안 및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1부에서 제5부에 이르기까지 일관하는 주지主旨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진정시키고 위무하자는 것보다 그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자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 서양음악의 한 양식으로서의 진혼곡은 우리나라의 배뱅이굿이나 씻김굿 같은 망자를 위한 의식儀式과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고, 레퀴엠을 우리말로 ‘진혼곡’이라고 옮기는 것도 딱히 적절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진혼鎭魂’이라면 무엇보다도 죽은 이의 혼 특히 원혼을 달래어 진정鎭靜케 하자는 것일 터인데, 레퀴엠은 그런 의도나 기능을 애써 드러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눈물의 씨앗이 장차 맺어 줄 환희의 수확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6부 ‘이 세상에 영구한 도성은 없지만’에 이르니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맞이하듯 노래가 씩씩해진다. ‘진혼곡’이 이래도 되는가 싶을 지경이다. 가사를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최후의 심판 날의 정경이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우리는 잠만 자고 있지 않을 것이요,

눈 깜빡하는 사이에 모두 변화하리라.(…)

죽음은 승리에게 삼켜지리라.

죽음아, 너의 쏘는 침은 어디 있느냐?

무덤아, 너의 승리는 어디 있느냐?

여기서 심판의 날을 맞아 나팔소리를 들으며 무덤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의 기고만장한 모습은 웅장한 합창과 독창으로 노래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7부 ‘죽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에 이르러 하느님에 대한 엄숙한 믿음이 넌지시 요망되는 것도 일종의 논리적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그들은 노고에서 벗어나 쉬게 될 것이요,

그들의 행한 일이 뒤좇으리라.

이 마지막 가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6부와 제7부는 그 앞부분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이 감동적이다. 아무 믿음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의 기분이 이러하거늘, 신심이 두터운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 부분이 얼마나 더 절실히 다가올까 싶다. 임종의 자리에서 이 마지막 부분을 들으며 눈을 감고 싶은 사람들도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독어 레퀴엠>을 좋아하는 것은 이 곡에 얹혀 있는 성경구절에 자자구구 설복 당하기 때문이 아니고, 왠지 곡 자체가 내 마음에 심상찮게 호소해 오기 때문이다. 일찍이 18세기에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한 장편시에서 세상에는 ‘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정신적 수양을 외면한 채 귀만 즐겁게 하려 든다고 하면서 빈정거린 적이 있거니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말씀보다는 그것을 담은 그릇 격인 음악을 더 좋아하는 것을 두고 염불보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염치없는 짓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앞서 나는 <독어 레퀴엠>이 내 영혼을 사로잡는 듯하다는 것을 내비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마감하는 자리에 누워서까지 이 곡을 듣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영혼 불멸설이니 망자 부활설 같은 것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은 필멸必滅이며 한번 멸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라고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지금 현재로 나는 영생은커녕 부활도 기대하지 않으며, 혹시 영혼이라도 있어서 환생하는 기적이 있게 된다면 한 포기 풀꽃이나 뭐 그런 미미한 것으로 되살아나기만 해도 극히 흡족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걸 두고 어찌 장담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차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이 마음이 무슨 변덕을 부리게 될지 어찌 예단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영문학). 서울대 인문대학장, 서울대 대학원장 역임.

저서 《조셉 콘라드 연구》, 《이효석의 삶과 문학》, 《두견이와 소쩍새》 외. 번역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암흑의 핵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