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이태동

수도원에 사는 신부 한 분이 언젠가 내게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일이 있다. 그 때까지 나는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내 마음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문 강가에 이르러 조용히 되돌아보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축복 받은 ‘행복의 조각’같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보다 내 기억 속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앞니 빠진 어린 아이의 웃는 얼굴이 나를 기쁘게 했다. 가을 날 수탉이 산촌 마을의 초가草家지붕 위에서 날개를 치며 길게 우는 소리를 낼 때. 먼동이 트는 자주 빛 새벽 하늘을 보았을 때. 어린 시절 개울가로 나가 세수를 하려고 할 때 물에 비친 얼굴을 보았을 때. 아침에 창밖으로 정원에 꽃이 피어있고, 새들이 지붕 위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다가 아래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른 봄날 쇄락한 향교鄕校 건물 앞, 뜰에 군락을 이루고 서 있던 앙상한 나목裸木 가지에 복사꽃이 무리지어 붉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새롭게 돋아난 잔디 위로 피어 홀씨를 날리던 민들레 우산과 라일락이 짙은 향기를 뿜으며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무거운 겨울옷을 벗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가 미풍에 접했을 때. 소식을 끊은 사랑하는 이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미소를 다시 보았을 때. 플라타너스가 있는 비개인 사월의 거리. 잠결에 들려오는 밤비 오는 소리.

해가 긴 봄날 토요일 학교가 일찍 끝나는 하학 길. 논둑 기슭에 하얗게 핀 찔레꽃 냄새. 동구洞口 앞 대장간에서 대낮의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오는 망치 소리. 이름 없는 풀꽃들이 패랭이꽃과 무리지어 피어 있는 개울가 방죽 길. 숲 속의 빈터. 깊은 산 속에 핀 푸른 도라지꽃을 발견 했을 때. 묘지 옆 잔디에 누어 바라다 본 가파르게 높은 하늘 위로 흘러가는 솜털 같은 흰 구름이 나를 기쁘게 했다.

무더운 여름날 강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추워서 밖으로 나와 햇볕 속에 뜨거운 바위를 안고 서 있을 때. 가을날 아침 밤나무 숲길을 걷다 이슬에 젖은 덤불 속에 떨어진 밤알들을 발견했을 때, 절벽을 타고 올라가 알을 낳은 새 둥지를 발견했을 때, 황홀한 기쁨을 느꼈다.

겨울날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 하늘을 향해 부챗살 모양으로 가지들을 펼치고 서 있는 겨울나무 위로 새떼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다 볼 때.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밤새 내린 첫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즐겁고 경이로웠던가.

객지客地에만 나가 계셨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셔서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앓고 있던 나를 D시의 대학 병원으로 데려 갔을 때, 흰 가운을 입은 누님 같던 간호부가 별이 있는 밤 성당 위로 눈이 내린 겨울 풍경을 담은 먼 나라 크리스마스 카드를 내게 주었을 때, 그것이 지닌 아름다운 경이로움 때문에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던가.

어른이 되어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한 후 건강을 회복하고 귀가해서 친숙한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서 장미꽃이 마당 가득 붉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눈 내리는 D시 기차역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어느 라디오 가게에서 하얀 거리로 울려 퍼지는 것이 들려왔을 때. 까맣게 잊었던 옛 친구를 기차역 군중 속에서 만났을 때. 어느 해 초겨울 먼 곳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어둠이 깔리는 간이역에서 지금은 헤어지고 없는 사랑했던 이가 플랫폼 전신주 아래 외투 깃을 세우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난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가. 부케를 든 신부의 모습.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 중의 <어떤 개인 날>을 듣고 샤갈의 그림 <소풍>과 <여자 곡마사曲馬師>를 처음 보았을 때. 프루스트의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읽고 났을 때.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잔디 깎을 때의 풀냄새. 국화꽃 향기. 가을 뜨락의 샐비어 꽃의 열병식. 축제일의 불꽃놀이. 바닷가 여관방에서 처음으로 하룻밤을 보낼 때 요람처럼 흔들리며 들려오던 파도 소리는 얼마나 좋았던가. 아카시아 숲이 있는 산기슭의 하얀 집으로 이사를 와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었을 때. 가을 날 저녁 무렵 라일락 나뭇잎이 황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젊은 시절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어찌 이것뿐이랴. 노동을 해서 얻은 돈으로 읽고 싶었던 책들을 한 아름 사서 들고 서점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눈부셨던 대낮의 햇빛. 석양 무렵 유서 깊은 듀크 대학 도서관을 나섰을 때 갑자기 고딕 건물 종탑의 은빛 종들이 광폭하게 흔들리며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는 소리. 곰팡내 나는 수십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대학 도서관 서가書架를 지나는 순간, 가난했지만 학문을 하겠다는 욕망으로 불탔을 때. 첫 강의실에서 보았던 순진무구한 젊은 학생들의 빛나는 눈동자. 잉크 냄새 나는 저서를 처음 보았을 때. 첫 원고료를 받았을 때. 산정山頂에 올라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을 때. 까닭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자와 대결해서 이겼을 때. 석양에 어딘가에서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갈채 속에 끝난 음악회에 갔다 돌아오는 길, 맑고 푸른 하늘에 흰 연기를 구름 띠처럼 남기고 사라지는 제트기. 날씨 좋은날 광장의 분수에서 솟구치는 은빛 물줄기,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의 날갯짓 소리. 어두운 겨울 광장에 불이 켜진 크리스마스 추리. 방학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수업─이 모든 것 또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