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피는 꽃

 

 

                                                                                   정태헌

먹장구름 저편에서 천둥이 두어 번 울어 옌다. 그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낯선 골목길을 걷다가 처마 밑에 들어 비가 긋기를 기다리는데 후드둑 후드드둑, 가까이서 빗방울 소리 사뭇 요란하다. 건너편 담장 너머에 넓적한 잎을 받쳐 든 무화과나무 한 그루 눈에 띈다. 그 잎사귀에 듣는 빗소리다. 수령이 오래된 나뭇가지에는 크고 작은 무화과가 촘촘히 열려 있다. 집주인은 누구일까. 도회 정원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수종인데, 비를 맞고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묵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무화과나무’가 눈에 암암하다.

산촌 고향집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먼저 ‘그 무화과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 키가 작아 손길이 열매까지 닿지도 않았지만, 누구든 무화과를 따는 걸 본 적이 없었기에 굳이 발돋움하려 하지도 않았다. 집 식구들이 무화과를 왜 바라보기만 하였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를 못했다. 고향 떠나 타관에서 나그네살이가 힘겨울수록 그 무화과나무가 가끔 아슴아슴하게 떠오르곤 한다.

무화과나무의 수피는 회백색이고 가지는 녹갈색이다. 잎은 넓고 두꺼우며 어긋난 데다 끝이 둔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 있어 볼품이 없다. 때깔이 고와야 맛도 있게 보이는 법인데, 열매조차 우중충한 암자색에 모양조차 대충 주물러놓은 작은 만두처럼 못 생겼다. 거친 잎사귀와 구부정한 수형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치명적인 것은 꽃 없는 과실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탐탐치 않은 대접조차 받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금기시되었던 선악과를 따먹은 나머지 부끄러움을 알게 돼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렸다니, 인류 최초의 의상인 셈이다. 그런 공로는 어디 가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며 예수의 저주조차 받았단 말인가. 외식外飾에 치우쳐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당시 사람들을 비유한 말이건만, 저주받은 무화과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니 어찌 명예로운 일이랴. 그뿐만 아니라 예전엔 먹으면 아기집에 탈이 난다며 혼전의 여인들에겐 무화과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니 이 또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나무일수록 내세울 만한 것 하나는 있는 법이다. 들추자면 열매다. 무화과의 붉은 속살은 복숭아처럼 향긋한 맛이 나며 과일 중에서 당도가 제일 높아 밀과蜜果라고 불릴 정도다. 열매는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듯이 속을 짯짯이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겉에만 집착하다 보면 실속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속을 톺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무화과가 만만한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흔히 무화과無花果를 ‘꽃이 없는 과실’이라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이 필요한데, 어찌 꽃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무화과나무도 꽃이 있다. 열매 속에서 내밀하게 꽃을 피우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열매를 두 쪽으로 갈라 속을 찬찬히 살펴보면 붉은 꽃술들이 표피 안쪽 벽에 촘촘히 모여 있는데 그게 바로 꽃이다. 열매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이 바로 꽃이기에 무화과를 먹는다는 말은 곧 꽃까지 먹는 셈이다.

열매 속에서 꽃이 피는 무화과는 때가 되면 제 몸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과육이 익을 무렵, 열매의 끝 부분에 구멍이 조금 열리는데 개미들이 드나들며 먹이를 구한다. 열매 속에는 많은 당분을 지니고 있기에 먹을거리로는 그만이다. 이어 초파리들이 찾아오고, 더 익으면 나비와 벌들이 날아와 과즙을 취한다. 드디어 열매가 벌어지면 까치나 직박구리가 과육을 찍어 먹고 나면, 마지막 속살까지 들쑤성거리며 독판을 치는 놈은 말벌이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없다. 이토록 많은 생명체를 불러들여 여름 내내 잔치를 베푸는 과실이 어찌 흔하랴. 이는 크고 작은 열매들이 차례대로 익어 가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넓적한 잎사귀는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기에 그 밑에 초석을 깔면 쉼터로도 안성맞춤이다.

이런 무화과나무를 낮추어 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지 싶다. 겉으로 핀 꽃만 꽃이라 여기며, 속으로 핀 꽃을 알아주지 않음은 야속한 일이다. 무화과나무인들 눈길을 끄는 겉꽃으로 피어 누군가를 향하고 싶지 않았으랴. 어찌 붉게 피어 훈풍에 흔들린 만큼 더욱 붉어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꽃은 안으로 안으로만 스며들어 애오라지 숫저운 꿈을 엮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을 터이다. 겉꽃만 화려할 뿐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것보다 더 낫지 않으랴. 피어 시들기보다는 차라리 열매 속에 고이 머무는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동안 엮어온 세월을 되작여 본다. 겉꽃이 빈약하다고 꽃 시절이 없었다고 불평하거나 서러워하지 말 일이다.저 무화과를 보라. 스스로 깊어가며 속으로 꽃을 피우고 있질 않은가. 시선을 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등을 다독여 주는 위로의 열매이지 않은가.

소나기 달려간 후 새무룩하던 하늘이 차츰 걷히자 무화과는 다시 갓맑은 침묵에 든다. 소나기에 영육靈肉을 씻은 저 무화과, 시방 무슨 사념의 켯속에 잠겨 있는 것일까. 무화과의 속꽃을 생각하며 비에 젖은 생의 골목길을 다시 뚜벅뚜벅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