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으로 살아가기

 

 

                                                                                           유영애

가을과 겨울의 건널목인 11월이 중순에 접어들면 마음이 바빠지고 스산해진다. 서서히 겨우살이 채비를 할 때가 돌아와서이다. 주부들이 모이면 김장 이야기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송년회 이야기도 슬슬 나온다. 복잡한 연말을 피해 아예 11월 중순경부터 송년모임을 갖는 경우도 흔하게 본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한마음 신우회’도 올해는 일찌감치 송년 정기 모임을 일산의 한 음식점에서 갖기로 하였다. 종교가 같은 다섯 쌍의 부부가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기 시작한 것이 어언 십 오년이 되어 꽤 친숙한 모임이 되었다. 회원들은 육십 대에서 칠십대 초반으로, 아이들은 분가시키고 대부분 부부끼리 홀가분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가 인연이 되어 맺어진 모임이라 식사를 할 때는 한 사람이 대표로 식사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그런 모임의 자리가 어색하고 별로 관심이 없던 남편이지만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자기 마음에 맞다며 지금은 즐겨 참석한다. 11월 모임은 11월 마지막 날이었는데 모두들 세월이 너무 무상하다며 쓸쓸한 표정들이었다.

신우회에서는 생일을 맞으면 모임의 날에 맞춰 조촐한 축하연을 한다. 주인공에게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며 촛불을 켜고 케익을 자른다. 이어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어린이처럼 율동을 곁들인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잠시 동심에 젖는다. 축하를 받는 사람은 감격하여 눈물까지 그렁거리는 경우도 있다. 가족에게 받는 생일 축하와는 또 다른 기쁨과 감동을 받는다고들 한다. 신우회 모임을 남편들은 ‘마덕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누라 등쌀에 남자들이 끼게 되었고 또한 마누라 덕에 먹고 산다는 남자들만의 은어다.

“되게 철딱서니 없네”

남편은 회원들이 애들처럼 박수를 치며 노래 부르는 분위기를 꼬집으면서도 싫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게 즐거운 만남으로 여러 해를 이어져 오던 신우회에서 어느 날 총무가 갑자기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제는 생일 축하 같은 행사는 그만두고 보람된 일을 해보자고 했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회비를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것이다. 새로운 이 안건에 대해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서 간에 기별도 안갈 정도의 작은 액수였지만 적절한 곳에 후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주는 기쁨도 조금씩 늘어갔다. 작년에는 개안 수술에 삼십 만원을 후원하였다. 주위에서 건설적인(?) 모임이라는 찬사를 들을 때마다, 우리들도 주는 기쁨을 맛보며 보람을 느끼곤 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좋은 명분을 실천하고 있는 신우회가 어느 때부터인가 점점 시들해졌다.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조촐한 이벤트를 열어 기쁨을 서로 나눌 때와는 달리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자 재미도 적어지고 의례적인 모임으로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생일 파티를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또한 회식 자리에서 어쩌다가 한 잔의 소주가 생각 날 때도 교회직분이라는 체면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도 송년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로 눈치만 볼 뿐 선뜻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후, 내가 침묵을 깼다. 아주 조심스럽게 음악회나 오페라를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모임을 통해 문화생활을 접하는 것도 의미 있는 모임이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여 의견을 내놓았다.

음악회 이야기가 나오자 총무가 잽싸게 휴대폰을 이용하여 가격을 알아 보는 것 같았다.

“제법 비싼데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총무가 말을 꺼내자

“관람료 타령과 후원금 이야기는 격에 썩 맞지 않아요”

볼멘소리가 튀어나오자 여기저기서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번엔 우리 자신에게 투자합시다”

누군가 말문을 열자 눈치만 슬금슬금 보던 회원들이 박장대소하며 체면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마음들이 헐렁해진 듯 금세 분위기가 환해졌다. 그제야 하나 둘, 속마음을 보이기 시작한다.

선행 하는 것도 좋지만 친목과 더불어 나이 들수록 무디어가는 감성에 기름칠(?)을 하자고 했다. 자신을 위한 문화생활도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남을 돕는 일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결국 삶의 질을 낮추고 생활의 탄력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한 마디씩 하였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는 오페라를 보기로 하였다.

때로는 내 영혼을 살찌우는 문화생활로 내 정서를 가다듬어야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웃 사랑도 그런 삶속에서 내 삶의 일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삶의 자락들은 모두 수평으로 껴안으며 살아 갈 일이라고 마주보며 웃었다.

 

 

《에세이 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아름다운 착각》 시조집: 《어머니의 괴얄띠》, 《연꽃 같은 사람 그립네》 동시조: 《망보다가 졸다가》. 노산문학상, 한국동시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