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박장원

평생 아무 말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은 말도 없다(終身不言 未嘗不言)’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말씀을 논한다’는 《논어論語》의 첫머리는 ‘자왈子曰’이다.

누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한다는데, 그 분은 무슨 말씀을 그리 많이 하셨을까.

공자는 말씀하셨습니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친구가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군에서 지상공수훈련을 끝내고 기본강하 4회를 마치면 하얀 독수리날개 문양을 왼쪽 가슴에 부착하는데,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 가슴에 붙은 그 휘장을 보며, 새파란 공수병인 내가 과연 높이 날 수 있을까 중얼거렸다.

배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부족함을 안다.

‘학學’은 배우는 것이고, ‘습習’은 어린 새가 날갯짓을 익혀 보들보들한 깃털이 굳센 날개로 바뀌는 상형이다. ‘학습’이 ‘학이시습지’에서 발원한 셈인데, 김시습金時習은 ‘때時’를 아꼈다.

선비는 밤낮으로 글을 익히고, 농부는 별자리를 부지런히 따르고, 대장장이는 주물주물 쇳덩이를 다루고, 장사꾼은 요모조모 손님의 비위를 맞춘다. 그러다가 깃털이 날개되면 높이 날지만, 묵묵히 시시때때로 익히지 않으면 고리타분해진다. 날다가 날갯짓을 안 하면 날지 못한다. 날마다 배우고 또 배워야,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

아들놈은 “아, 나는 좋은 친구가 왜 이렇게 많지.”하며 즐거워한다. 그런 시절이 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해는 져서 어두운데 밝은 달만 쳐다본다며 동무 탓만 하고 있다.

끼리끼리 모인다. 백로 노는데 까마귀는 안 간다.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끼리 모이고,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끼리 뭉친다. 재물을 보고 모였지만 재물이 없어지면 흩어지고, 권력을 보고 모였지만 권력을 잃으면 흩어지고, 명예를 보고 모였지만 명예가 떨어지면 흩어진다. 왔다가는 가듯이 너무 자연스런 일이라 탓할 것도 없다.

친구는 나를 알아준다.

빛이 거기까지 번졌기 때문에, 그 빛그림자를 더듬어 멀리서 찾아온다.

영국의 칼라일과 미국의 에머슨은 처음 만나 그냥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만보다가 헤어진다. 소리없는 아우성, 그들은 서로를 알기에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까지 즐거워진다.

아름다운 양귀비가 무리지어 길가에 피었다.

하양 분홍 선홍이 요염하게 어우러져 한들한들 꽃구름 되어 차창 밖을 떠돈다.

집에다가 피워보려고 꽃씨를 화분에 뿌렸다. 그런데 여름이 다가고 가을이 와도 감감무소식이다. 잘못되었다고 여겼지만, 속으로 서운하였다. 그 생태를 잘 몰랐던 것은 나중이고, 우선은 거부당한 느낌으로 섭섭하다. 그 꽃씨도 불편하였을 것이다. 한 해를 쉬고 이듬해 봄에야 활동하는 것도 모르면서 애꿎게 물만 주었으니 말이다.

살갑게 대해주면 상대는 반갑게 다가선다. 때를 맞춰 씨앗을 보살폈다면 화사한 자태로 나를 반겼을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뜻대로 안 된다고 구시렁거리다가, 양귀비와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위가 적막하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무엇이 서운하였을까.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바보처럼 웃기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사슴이라고 하면 사슴으로 알고, 말이라고 하면 말로 알아야 했을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섭섭한 것은 왜 그리 많았을까.

임진강변 황희 정승의 반구정伴鷗亭은 뭐니뭐니해도 늦가을이다.

샛노랗게 은행잎이 물들 무렵, 재실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러기로 가득하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허공을 가르며 줄 맞춰 날아가는 모습이 힘차다. 한 해 동안 부대끼고 치대다가 애오라지 가족과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간다.

조선의 명상은 정자에서 뒷짐 지고 서서 무슨 상념에 잠겼을까.

기러기는 저들끼리 활기차게 날아간다. 나는 내 가족이나마 그렇게 이끌 수 있을까.

성현의 이야기를 보듬었다지만, 허튼 소리만 많았다.

빈 하늘에는 바람소리만 휑하다.

 

 

《수필문학》과 《계간수필》로 등단.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 평론집 《코끼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