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며

 

 

                                                                                  김효남

“영산홍이 참 곱구나….”

서울대 분당병원에 가는 길에 아버지(고 김태길 선생님)가 한동안 차창을 내다보다 하신 말이다. 작년 4월이었다. 오래도록 건강을 잘 유지해 오던 아버지가 입원을 위해 차에 타셨을 때 그 마음이 사뭇 복잡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꽃을 사랑했다. 평소에 가벼운 진료를 위해 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병원에 다녀 올 때마다 꽃집 앞을 지났다. 아버지는 습관처럼 말씀하셨다.

“꽃이 참 예쁘구나. 근데 네 어머니는 꽃 사는 걸 안 좋아해. 근데 이 집 꽃이 싸거든.’

“제가 사드릴게요, 아버지.”

아버지는 늘 조그마한 꽃 화분을 한 개만 골랐고 내가 두 개를 사면 ‘뭘 두 개씩이나’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하셨다. 어머니라고 꽃을 싫어하셨을까. 아버지는 딸이 사드리는 몇 푼 안 되는 꽃이 흐뭇하셨나 보다. 이 꽃집에서 과연 앞으로 몇 년이나 꽃을 더 사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고 오래도록 아버지께 꽃을 사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아버지는 90세를 사시고 지난 해 5월 말에 우리 곁을 떠났다. 남들은 장수하셨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호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래 건강하게 기다려주셨음에도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못난 자식의 후회일 것이다.

꽃이 지천인 계절에 아버지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셨고 어떻게든 기운을 차릴 만한 것을 잡숫게 해드리려고 온 가족이 애를 썼다. 한 고비만 잘 넘기시면 될 것 같았다. 정신 없이 친정에 가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전에는 한 달에 두 번 가기도 빠듯했던 내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의 원기를 회복시키려는 노력만 했지 이별을 앞둔 소중한 시간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음 가운데 설마 이 정도는 이겨내시겠지, 이겨내셔야 해, 하는 우격다짐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와의 시간에 왜 예쁜 꽃 화분을 사 들고 친정에 갈 생각을 못했을까.

수많은 조문객과 좋아하시던 꽃에 첩첩이 둘러 쌓여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장례식을 다 치른 뒤였음에도 인터넷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생경함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정말 가셨나 보구나.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난 제대로 울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조용히 실감날 때쯤 가족들과 실컷 흐느껴 울게 될 날이 오겠지 했는데 막상 어머니 앞에 둘러 모이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되려 안 그러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더 농담을 하고 많이 웃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늘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 전, 아들이 말했다. 전에도 외할아버지 글을 좋아했지만 요즘 다시 읽으니 더 마음에 와 닿는다고. 왜 생전에 외할아버지의 글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럽다고.

‘너도 그렇구나….’

입원해 계셨을 때 아버지가 말씀 하셨다.

“글은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거 같더라. 많이 쓴다고 점점 더 잘 써지는 게 아냐. 내 초창기 글 중에 더 괜찮은 게 있거든.”

“저는 무언가를 써내려 가다가 한 번 꽉 막히면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방치해 두게 되요.”

“내가 읽어보면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구나.”

60년 동안 수필을 쓰셨지만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한 번도 가르치려는 자세를 보이신 적이 없다. 언젠가 수필을 쓰는 방식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주제넘게 반기를 들었다.

“네가 그렇게 반론을 펴니 내 생각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구나.”

아버지가 조용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하룻강아지를 너그럽게 용납하신 아버지 앞에 돌이켜 생각할수록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버지는 내가 계수회(계간수필로 등단한 이들의 모임)의 일원이 된 것을 기뻐하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수필의 세계에 어설프게 발을 디민 딸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셨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글을 잘 써야 한다든가, 열심히 쓰라든가 하는 훈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다. 딸에게 글 쓰는 기쁨을 전해주고 싶으셨지 글로 스트레스를 받게 하고 싶지는 않으셨던 것일까.

아직 나누고 싶은 말도 많고 해드리고 싶은 것도 다 못해드렸는데 아버지는 고요하게 자취를 감추듯 떠나가셨다. 삶에서도 그 분의 글처럼 여백의 미를 소중하게 여기신 걸까. 백 가지 아쉬움이 남지만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아버지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시고 세례를 받은 일이다.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씀 드렸다.

“그 동안 잘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받기만 하고 해드린 게 없어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딸이어서 늘 자랑스러웠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창밖을 본다. 하늘이 뿌옇고 흐리다. 얼마 있으면 영산홍이 필 텐데…….

 

 

2008년 《계간수필》로 등단.

금속공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