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력

 

 

                                                                                          윤재천

우주의 정체성은 포용包容의 의미로 ‘휩싸 안음’이다.

이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마음가짐이 ‘도량度量’인데, 이는 길이를 재는 자나 양量을 헤아리는 되를 지칭하는 용어이나, 우리 선대先代는 이 용어의 뜻을 변용하여 ‘남의 잘못까지도 싸 덮어줌’ - 남의 입장을 ‘헤아려 베풂’의 뜻으로 사용해왔다.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 지나치게 야박한 것은 누구도 덕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스스로 손해를 보려는 마음이 그만큼 커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쌀 궤櫃 안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고, 저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쓸어 모으는 데 이력이 나서 세상이 전쟁 터를 방불케 할 정도다.

2010년 벽두에 어느 방송사에서 경주 땅 최 부자富者 댁을 모델로 한 기획 극劇으로 명가名家라는 작품을 올려 방영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현재상황이 어느 정도인가를 실감케 한다.

모든 대립과 갈등은 도량이 넓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마땅한 제몫까지 밀쳐내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없으나 어느 정도에서 대립되었던 마음을 끌어들이고 베풀려는 미덕의 사례를 좀처럼 볼 수 없어, 아쉬운 것은 특정한 누구 하나의 마음만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주宇宙’라는 공간 안에 발을 딛고 사는 무리이고, 일용한 양식을 비롯해 모든 자원을 우주에서 구해 사용하며 사는 무리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주는 모든 존재물의 어버이와 다르지 않다. 생존의 움이 튼 것이 우주이고, 그 덕에 삶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는 돌연변이에 의한 변종變種 - 별종別種의 존재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무리들이다.

이제 우리는 원래의 우리로 돌아가야 한다. 본성本性으로 귀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재앙의 순간을 맞을지도 모른다. 순리順利에 순종하는 것만이 영생永生의 유일한 길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어느 것도 파탄을 면할 수 없다. 댐(dam)을 쌓아 물길을 막는 것도 어느 한계까지는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그에 의존해서는 어려운 사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의 ‘댐’은 일시방편일 뿐이지 영구대책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제도나 법률 - 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인간의 ‘꾀’에 근간한 모든 것은 부실한 댐에 불과하다. 순간의 이익 정도는 이슬 한 방울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낱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순간의 이익 정도는 이슬 한 방울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것을 상대나 목적으로 해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누가 봐도 유치한 짓이다. 따라서 정작 부끄럽게 여겨 낯을 붉혀야 할 상대는 제삼자가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겐 가혹할 정도로 인색하면서도 자신에겐 지나치게 관대해 오늘과 같은 사태가 지속되며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을 무시하고, 그렇지 않거나 못한 것에서도 철저할 만큼 노예처럼 굴복하고 있으니 어려운 문제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요즘 독서인구가 감소하고 이 방면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이런 현실도 우리의 사회현상과 무관치 않다. 남의 생각이나 의견은 다 쓸 데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아직 현실화 되어 있지는 않지만 형식을 갖춰 쏟아내기만 하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망상妄想에 젖어 있으니 무엇이 눈에 들어오고 또 귀에 들리는지 모르겠다.

수도원修道院을 도시 한복판이 아닌 깊은 산중이나 섬 - 외딴 곳에 두는 것은, 그 침묵의 공간에서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다. 육체적으로 가혹한 상황에 적응해야만 그만큼 정신이 한 개체의 주체로서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정신이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속세를 떠나 사는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인 모두가 행할 때, 원래의 우주 정체성은 ‘원만함’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서로 마주보기’보다는, 같은 방향을 ‘같이 보는’ 지혜 - 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상대를 자기발전의 장애로 여겨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同志愛로 한 길을 같이 가려할 때, 대립과 갈등은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가 있다.

음陰과 양陽은 대립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양면성이고, 이는 끊임없이 순환을 계속하기 때문에 대립각對立角을 세우고 상대를 제거하려 애를 태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이 순리를 인위적으로 거스르려고 하기 때문에 추한 몰골을 보이게 된다.

우리 세대가 서양철학과 사상에 매료되어 있는 사이, 문화 문명의 늪에서 그 경이로움에 빠져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근성이 동물적으로 변해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상대를 섭렵해 굴복시키려는 존재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강한 야수野獸도 생을 마치면 풀과 나무의 거름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순리의 사실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주역이 순환하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생존의 이법理法은 복잡한 것만은 아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이 생성하여 약정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고, 천지간의 현상도 이와 다르지 않아 순리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를 계속한다. 이런 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해와 달은 빛을 통해 주변을 밝힌다는 사실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역리逆理에 지나지 않고, 갈등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주변의 상대를 동료애로 감싸는 기적과 같은 일이 자연스럽게 조성되기를 기원해본다.

모든 일은 마음을 따라 걸음이 움직이는 만큼, 이 일은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전 중앙대 교수, 계간 《현대수필》 발행인.

《윤재천 수필문학전집》 전7권, 《수필작품론》, 《수필작가론》 등 다수.

한국수필문학상, 한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