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한 마리

 

 

                                                                                      한경선

유리잔에 담긴 물 위에 꽃송이가 하나하나 피었다가 가라앉는다. 꽃에서 우러난 자색 물빛이 맑고도 담담하다. 우선 눈으로 맛보고 마음을 적신다. 그런 다음 차를 입안에 굴려 천천히 삼킨다. 꽃차라서 단내가 나는가 싶었는데 이내 자취를 감춘다. 꽃잎은 시간이 갈수록 진한 물빛을 만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 사람은 작은 유리병 속에 든 맨드라미 꽃차를 내게 전해주었다. 붉은 빛이 살짝 걷힌 마른 꽃이었다. 여름을 손수 갈무리해서 만든 특별한 선물이었다. 주는 사람의 얼굴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붉게 물들었다.

그이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맨드라미 꽃차처럼 담담하고 고왔다.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게 녹아서 주변을 물들이는 사람이었다. 아껴둔 꽃차를 유리병 너머로 보곤 한다. 그 빛깔을 보며 가을과 겨울을 건너고 봄을 맞을 것이다.

또 한 사람과 처음 만난 날, 헤어지는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작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그 속에 조롱박 바가지가 들어 있었다. 선물로 받은 박 씨를 친정집 마당에 심었다가 가족들이 모여 조롱박 추수를 해서 만든 것이라 했다. 조롱박을 심고 기른 마음이 내게 와서 닿았다. 조롱박을 타고 손질하면서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쏟아냈을 광경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어떤 꾸밈도 없이 그저 조롱박을 반으로 가른 투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꼭지까지 붙어 있는 것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어디 마땅한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책꽂이 위에 얹어놓았다.

집에 와서 보니 가방 속에 손 글씨로 쓴 수줍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의 설레는 마음을 적어놓았다. 읽는 동안 마음 속에서 조롱박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실팍한 바가지 속에 편지를 넣어두었다.

이국의 바닷가에 사는 원주민들이었다. 옷을 따로 갖춰 입지 않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부족장이 이발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발사는 어디서 구했는지 깨진 유리 조각을 귀한 도구인 양 꺼내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잘랐다.

“나는 부족장이니까 머리를 잘 깎아야 해” 하고 웃으며 말하는데 이발사의 얼굴에 감도는 옅은 긴장감을 보니 어쩐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발이 끝나자 작은 거울을 본 부족장이 흡족해 했다. 그리고 고마움의 대가로 구운 물고기 한 마리를 주었다. 그것을 받은 이발사는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물고기 한 마리로 고마운 마음을 주고받다니. 동화 속의 이야기다. 아니, 곰이 인간이 되고 싶어 굴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있을 것 같아서 흘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에서 잠깐 본 그 장면이 꽃차를 마신 것처럼 마음을 붉게 물들여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귓가에 조롱박 종소리도 들렸다. 이렇게 작은 것들이 마음을 흔든다. 이 세상 어딘가에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마음이 맑은 지음知音이 곁에 있다는 건 더욱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2001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2003년)

수필집 《빈들에 서 있는 지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