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론|

 

수필 쓰기의 행복

 

 

                                                                                      최원현

수필은 서정이라는 정서와 지성의 날카로움을 바탕에 깔고 예리한 관찰력과 사물을 통찰하는 예지로 자기 체험에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 물론 자기 고백적이라는 점에서 자화상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작가의 사색과 관조와 상상(문학적 창조성)이 들어있는 수필은 어느 문학도 따르지 못하는 품격 높은 문학이다. 작가의 체험이 소재가 되는 게 수필이지만 그 체험이 바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필은 정밀精密한 언어의 선택과 치밀緻密한 구성이 이루어낸 향기로운 결정체結晶體이다.

《계간 수필》 통권 58호인 2009년 겨울 호에는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다양한 수필 빚어내기의 한 판이 펼쳐졌다. 제각기 맛과 멋이 넘치는 수필들에서 수필의 시대다운 다양한 생명력의 세계를 본다. 해서 거기선 향기가 넘쳐나고 그걸 이루어 낸 행복감은 하늘에 닿는다.

<미역국 한 그릇>(고임순)은 짜임이 돋보이는 수필이다. 단락별 대표 문장만 간추려 봐도 내용 전달이 확연하게 그림이 그려지듯 그려지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은 음식 중에 밥, 김치와 함께 미역국만큼 자주 먹은 음식은 없을 것이다./내가 난생 처음 요리 해본 음식도 미역국이었다./미역국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난다./미역국 향기를 유별나게 진하게 느낀 것은 이역만리 미국 버팔로의 어느 마을에서였다./바로 내 고향,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진한 향기였다./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미역국을 끓였는가./그런데 정작 내 생일에는 내 스스로 미역국을 끓이기가 싫었다./세월이 간다는 것이 서글프다./어느덧 성장한 3남매가 결혼을 하고 분가하자 우리 부부만 마주앉아 밥상을 대하게 되었다./내 생일이 다가오면 전날에 미역을 담가놓은 남편은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이렇게 서로 끓여주는 생일을 보내면서 사랑은 쌓이고 세월은 흘러갔는가. 지난 우리들의 시간은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먹을 수 있는 축복 속에 마냥 행복했다./신록이 싱그러운 5월이 저무는 무렵, 나는 생일을 맞는다. 생일 아침, 상에 올라와 있는 내가 끓인 미역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평생 끓인 미역국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맛이 없을까./텅 빈 집에서 벽을 쳐다보고 나 혼자 먹는 미역국 한 그릇, 창 밖에서 새 한 마리 말똥말똥 기웃거린다.

미역국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난 후 먹는 첫 음식이다. 그 탄생을 기념하는 생일에도 먹는다. 미역국을 먹는 것은 생명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작가의 사랑하는 남편은‘종국에 미역국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어느 날, 인생의 모든 희비애락을 포옹하듯 감싸 안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생일에 혼자서 미역국을 먹는다. 그것도 자기가 끓인 미역국이다. 헌데 맛이 없다. 아홉 식구의 미역국을 수없이 끓여대던 숙달된 솜씨인데도 말이다. 맛이란 뭘까. 작가에게 맛은 음식 자체의 맛이기보다는 옆에 같이 있어야 할 사람, 그리고 같이 먹어줄 사람이다.

미역국은 내가 나를 위해 끓이는 게 아니다. 해서 미역국은 사랑의 베품이고 내 생명을 나눔이고 그렇게 서로의 피를 맑히는 성스런 주고받음이다. 혼자 먹는 미역국이어서 맛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맛을 결정하는 것이 단순히 맛이 아니라 분위기와 정황이 더 중요함을 말함이다. 외로움, 슬픔, 그리움, 추억이라는 입맛들이 고유의 미역국맛보다 넘쳐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미역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외로워하고 슬퍼하고 그리워만 하지는 않는다. 미역국을 통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나를 사랑하던 사람을 느낀다.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자칫 눈물이 나버릴 수도 있는 순간을 새 한 마리를 불러들여 말똥말똥 기웃거리게 함으로서 분위기를 밝게 끌어올려버린다. 그렇다면 새 한 마리의 존재는 무언가. 지나간 나의 시간들은 행복이다. 아픔조차 아리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독자와 함께 살그머니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수필, 그런 수필의 맛을 보이고 있다.

<공항에서>(문혜영)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수필이다. 작가가 겪은 공항에서의 사건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 가운데 살아왔는가도 깨닫게 한다. 세상의 기준으로도 나는 심히 불안한 존재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의식치 못하고 살았다.

작가는 아이들에게로 날아가는 꿈을 참 많이도 꾸었다. 모스크바로 발령이 난 사위를 따라 딸아이가 떠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그런 딸과 사위를 찾아간다는 일, 곧 어디론가 떠난다는 일이 참 쉽지가 않다. 한 달 동안이나 집을 비우려 하니, 올봄부터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 문제가 가장 난감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가기로 했다.

인천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탑승수속을 끝내고, 여행자보험을 들기 위하여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 창구 앞에 섰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혹시, 큰 수술을 하셨던가, 병원 치료를 받으신 적 있으신가요?” 하고 묻는다. 작가는 몹시 당황한다.

‘여행자보험이라는 것이, 비행기 사고가 생기든가, 짐을 잃어버리든가, 길을 잃든가, 강도를 당하든가…, 아무튼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드는 보험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순간 작가는 ‘현기증이 일고 아득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작가를 남편은 툴툴거리며 외국보험회사 창구로 데리고 간다. 작가는 이번엔 먼저 병력부터 밝힌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벽을 만난다. ‘이쪽은 완치판정이란 말은 약관에도 없는지, 그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죄송합니다. 손님!’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작가는 ’홀로 지구 밖으로 밀려나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출국장으로 들어서며 가방 속을 확인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얼마간의 돈이 든 지갑, 여권, 비행기 표, 수하물 짐표, 남편의 보험약정서 등 모두 있는데, 하나가 확인되지 않았다.‘ 작가는 ’수하물 짐만큼의 보장도 받지 못한 내 목숨 값, 저울질조차 거부당한 목숨 값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 암환자를 가리켜 누군가 내뱉던 ‘못 건널 강을, 이미 건너버린 사람‘이란 말이 떠올랐다. 결국 보험을 들지도 못한 채 비행기에 오른다. 그런데 ’귓속이 먹먹했다. 비행기 이륙 전부터 시작된 이명은 모스크바 땅에 나를 내려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한 달을 살고 돌아오는 하늘 길에서도 내내 귓속이 어지러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천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이명이 한꺼번에 뚝 멈춰버린다.‘ 작가는 ’내 귓속에서 한 달을 울어대던 매미란 놈이 어느새 떠난 모양‘이라고 했다.

‘수하물 짐만큼의 보장도 받지 못한 내 목숨의 값’이고, ‘저울질조차 거부당한 목숨값’ 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런 나임을 깨닫는 순간 내 귀는 이명을 앓는다. 이명은 내가 늘 듣던 소리를 놓치는 대신 듣지 못하던 소리에 붙잡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내 소리막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작가는 내 집, 내 고향, 내 땅이라는 인식이 주는 평안함이 긴장을 풀어주자 평상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공포보다도 그가 앓았다는 것만으로 ‘목숨값’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상황에 더 놀란다. 그의 이명은 그런 그를 숨겨준 것일 수 있다. 존재감을 잃어버린 그의 절망, 부끄럼을 어둠처럼 감싸주었다. 작가는 현대속의 자기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존재는 자신만이 지킬 수 있음을 다시 인식함으로 무언의 외침을 시도한다.

<상형문자>(정목일)에서 작가는 이집트 황제의 무덤과 대만 고궁 박물관에서, 상형문자를 보고 고대의 세계로 돌아가는 듯 했다고 말한다.

하늘, 달, 별, 물, 나무, 사람... 등을 첫 눈에 척 알아볼 수 있게 해놓은 기막힌 솜씨의 상형문자는 작가를 상상의 숲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상형문자의 벽면에 홀려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소통과 교감의 세계’로서 관계 맺음이고 소통이었다.

상형문자 벽면은 생명의 신비를 담아 놓은 거대한 벽화로 ‘망자는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영혼은 우주에 닿아 있었고, 영원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본다. 알기 쉽게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현대의 삶에서 작가는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수 없는 상형문자를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정확, 단정, 확인이 아닌 생명 질서의 발견과 삶의 이치에 대한 공감’을 느낀다. 뿐 아니라 ‘우주 음音, 자연 율律’과 ‘균형과 조화’를 상형문자에서 본다. 또 상형문자를 통해 고대인들이 발견했던 영원도 본다.

작가는 상형문자에선 고대의 햇살이 넘치고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글자가 개미 같고 새처럼 보였다. 물고기도 같고 풀 같기도 했다. ‘자연물들이 그대로 글자가 되어 중얼거리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생한 세상’이었다. 작가는 상형문자를 통해 ‘먼 기억처럼 사라져버린 고대문자 속의 세상’을 다녀온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를 한 시선 안에 놓고 영혼만 유체이탈을 하여 상형문자의 시대로 들어가는 상상 속에서 독자를 그 세계로 인도한다. 서정수필이 주는 한계를 이런 상상력의 확대를 통해 직접체험의 한계성까지 극복해 낸다.

작가에게 있어서 상형문자는 언어·문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는 불교의 불립문자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옷걸이>(김명규)는 약간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수필이다.

작가는 ‘정일나사’라는, 자음과 모음이 반씩 지워진 글씨가 남아있는 옷걸이를 발견한다. 순간 삼십 여 년 전 일이 바람처럼 날아와 이마를 쳐든다.

정일나사는 읍내 번화가에 자리했던 양복점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을 담임하던 남편의 학급에 이재용이라는 그 양복점 주인의 아들이 있었다. 헌데 남편은 그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라며 출근하는 일조차 심란해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정일나사라고 쓴 상자 안에는 새 양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장롱 안에 걸어둔 밝은 감색의 그 추동복을 남편은 늦가을 쌀쌀한 날씨에도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복점집 아들 재용이의 국어 점수가 학급 최고 점수를 받은 수석 학생과 동점이 나왔다. 그렇게 좋은 점수를 낼만한 아이가 아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가 학교로 오게 되었는데 다짜고짜‘숙직실로 들어서자마자 준비해 온 줄자를 남편의 가슴에 둘러대더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치수를 적어 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양복을 가져온 재용이 아버지, 양복은 할 수 없이 집으로 왔지만 양복은 교사인 작가 남편의 양심과 자존심을 있는 대로 건드렸다. 그 양복은 그렇게 옷걸이에 걸려만 있었다. 어쩌면 작가의 남편은 매일 매일 걸려있는 양복을 보며 교사의 양심과 자존심을 세우며 스스로를 바로 서도록 채찍 했으리라.

삼십년이나 된 옷걸이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사실만도 놀랍지만 그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의 가슴들을 흔들고 있다. 받는 것과 받지 않는 것에 따르는 도덕적 문제가 현실적 문제라면 삼십년 전 그때엔 진정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름다운 풍속이었던 때다. 작가는 그게 더 가슴 아팠다. 그러나 작가는‘세월은 사람을 성정대로 만들고, 제 격에 맞는 인생을 걸 옷걸이는 각자에게 다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그리고‘열 번도 더 변하는 것이 사람인지라 재용이는 큰 사업가가 되었고,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연로하신 은사들을 찾아뵙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단다.’

한 때는 불쾌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던 양복이었겠으나 지금의 재용이를 보면 기쁘게 자랑스럽게 입을 수 있는 양복이지 않은가.

계간수필 겨울 호엔 40여 편의 수필이 실렸다. 그 중 4편만 뽑아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거론하고 싶은 작품이 참 많았다.

<잠>(이은희)은 기행수필인데도 제목도 특별하게 잡았지만 독특한 시각으로 ‘잠’을 본다. 썰물로 드러난 바닷길 위에 홀로 잠든 남자. 나비잠의 자태다. 작가는 그 남자의 잠든 모습, 나비잠의 형태를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자리, 그리고 바다를 양수로 보면서 한 남자의 낮잠을 통해 근원적 ‘평화’를 끌어낸다.

그런가 하면 예술가의 수필 피아니스트 이혜경의 <가을이 문을 두드린다>는 높은 철학적 사유가 음악을 통해 연출된 수필이다. 소리 이전의 침묵에서 출발하는 음악, 0.003초에 음색이 결정되는 정교한 피아노 소리, 하나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으로 하나를 만드는 음악 등 음악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각과 표현들이 새롭다.

수필은 사색과 관조로 이루어낸 격조 높은 글이다. 그러면서 가장 멋스럽고 맛깔스런 글이다.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목청을 가다듬고 내는 시조창 한 가락 마냥 여유롭고 한가롭게 평화를 여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의 정재은 수필 <치마>와 <은반지>가 바로 그랬다. 평범 속에서 찾아낸 특별함, 그게 수필의 맛이기도 하다. 또한 회고록 <지나온 발자취>(김규련)는 한 작가의 시간과 공간적 삶의 공간에 함께 들어가 볼 수 있게 했다. 계간 수필의 자랑인 집중 조명에서는 이항녕 선생의 <더 높은 곳에>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평성 강한 합평 내용이 수필 비평이 약하다는 우리 수필 문단에 바람직한 비평의 방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15매 내외의 짧은 글 한 편을 이뤄내기까지 마음에 드는 적합한 단어 하나를 찾아냈을 때의 기쁨, 원하는 문장으로 빚어질 때의 보람, 읽는 이의 공감이 예상되는 흥분은 작가만이 맞볼 수 있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그래서 수필을 쓴다. 혼자 담아두기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기까지의 산고産苦가 필수지만 해산의 보람과 성취감은 공감, 동감, 감동의 세계로 독자와 작가가 하나 되는 자리에선 그냥 행복이다. 이번 계간 수필 겨울 호에선 그런 수필쓰기의 행복을 맛본 분들이 유난히 많았을 것 같다. 이 맛, 이 기분이 수필을 쓰게 하지 않던가.